brunch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그건 바로 애사심

by 오와나


꿈에 그리던 나의 회사라는 것이 생긴 뒤,

바닥을 치던 자존감은 슬슬 올라오고 있었다.

여전히 취준을 하던 친구들을 만나 밥 한 끼 사주며 힘내라고 말할 때도

어느새 우월감에 조금 취해있었던 듯도 하다.


입사한 지 서너 달쯤 지났을 때,

외가 식구들끼리 모여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다 같이 밥을 먹고 과일을 깎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이었는데,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나의 회사가 자연스레 화두에 올랐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법한 대기업이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렇지는 못한 회사였는지라 구구절절 내가 우리 회사는 그래도 내실이 튼튼한,

꽤나 괜찮은 회사라는 것을 알려야 하는 불편함은 있었다.

그래도 업계에선 TOP5 안에는 들 수 있는,

신입사원의 연봉치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수준을 제공하는

멋진 회사였다.


"네. 그래도 업계에서 나름 유명한, 발전가능성 있는 회사예요!"

라고 회사를 한껏 올려주고 그 위에 자연스레 내가 탑승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훅 들어오는 이모부의 말.

"그래도 공기업, 공무원이 최고지. 여자가 애 낳고 다니기도 좋고.

우리 회사에 그런 전형 있다고 들었는데, 한 번 지원해 볼래? 알아봐 줄까?"


뭐라고요...?


화면 캡처 2025-01-23 220312.jpg


회사뽕에 차서 잔뜩 고취되어 있는 내게,

그런 말을 던지는 이모부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나는 정말 화가 났다.


첫째, 왜 나의 회사를 무시하는 거죠???

우리 회사 어떤 회사인지 잘 아시나요?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어느 정도의 월급을 받는지 자세히 아시나요?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욧!


둘째, 여자가 다니기 좋은 회사가 왜 따로 있죠??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일할 수 있어요!

내가 애를 낳을지 안 낳을지도 잘 모르시잖아욧!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말들을 꾹 눌러 참으며 대충 못 들은 척하고 넘어갔지만,

그때는 내가 이 회사 열심히 다니고 돈도 많이 벌어서

저 말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말임을 꼭 증명해야겠다 다짐했다.


화면 캡처 2025-01-23 221933.jpg 새해가 되었으니 이제 10년 차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모부 말의 의미를,

그 말이 여전히 틀리지 않은 이 사회를,

나는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다.

정년이 보장되어 있는 회사가 주는 안정감이 어떤 것인지를 굳이 알게 되었다.

자유로운 육아휴직을 누릴 수 있는 회사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굳이 굳이 알게 되었다.


사기업은 별 수 없이

여전히 권고사직, 희망퇴직 등이 흉흉하게 이뤄지고 있고,

육아휴직은 사치며,

임신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팀 내에서 죄인이 되어버리는 일들이

2025년 새해에도 자행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입사한 지 한 2년쯤 됐을 때 나의 사수가 출산휴가로 3개월을 쉬게 되었다.

그녀의 업무 중 일부분을 내가 떠 앉게 되었는데, 나는 그때 그녀를 원망했다.

내가 원망했어야 하는 대상은 사수가 아니라 사실은 회사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3개월쯤은 네가 해내야지.
고작 3개월인데 사람을 어떻게 뽑아줘?
그것도 너의 운이지. 니 사수가 임신한 걸 어떡하니?


이 말들에 어린 나는 사수의 탓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어떻게든 비용을 늘리지 않으려는 회사는 누가 출산휴가를 가든 말든 남은 사람에게 일을 떠 안겼고,

출산을 한 사람은 고작 주어진 100일의 시간 동안 몸조리를 바쁘게 마치고,

이제 겨우 목이나 가눌 줄 아는 그 작고 여린 생명체를

어딘가에 맡기고서 출근을 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이다.


회사는 이익을 내는 집단이지 복지단체는 아니다.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것은 이제 정말 잘 알겠다.

그래서 나도 내 이익을 떠올리다 보니 애사심은 다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화면 캡처 2025-01-23 215316.jpg 애사심이요? 아니 없어요 그냥.

내 자존감이었고, 내 힘이었고, 내 자랑이었던 나의 회사는

지금 어디로 가버렸을까?

내일 또 출근을 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진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6화신입이 들어오면 행복할 것 같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