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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두 단어 02화

겨울과 산책

flaneur : 한가롭게 배회하는 산책자

by 바질

넷플릭스에서 방랑의 미식가를 본다. 50대 갓 은퇴한 일본 아저씨의 미식 탐방기다. 약간 정의롭고 약간 옹졸한 성격. 주변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라 정겹다. 아저씨는 맛난 점심밥을 찾고자 오후 햇빛 내리는 골목을 이리저리 걷는다. 그 모습이 한가롭다. 삼삼한 맛이 나는 드라마다.


미식가 아저씨의 자존감 찾기. 점심에 맥주를 시킬까 한참을 고민한다. 여자 손님이 많은 브런치 전문점에서 부끄러워하며 밥을 먹는다. 아내가 준 썬글라스를 끼고 산책하는 자신의 모습에 취했다가, 누가 수군거리는 것 같으면 이내 부끄러워서 벗었다가 한다. 그 모습이 사회생활 눈칫밥에 익숙해진 모습 같아서 짠하다. 그러다가도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지고 한다.


미식가 아저씨처럼 매 끼니를 신중하게 고르고 싶고, 한참을 고민하다가도 내가 원하는 선택을 했으면 한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며 골목길을 산책하는 과정도 좋다. 하여 오늘은 점심에 늘 가던 곳 말고 새로운 떡볶이 가게를 가자고 제안했다. 다만 즉석 떡볶이가 주니어의 입에는 맞지 않았나보다. 미원 네 숟가락만 넣으면 이 맛을 낼 수 있다나. 오늘도 미운 직원의 입은 움직인다.


어찌 보면 그것도 열심히 사는 모양이라 할 수 있을까. 주댕이로 사는 것에도 힘은 필요할 테니까.


겨울 점심 오후 산책, 생각보다 괜찮다. 다리는 춥고, 몸은 따뜻하다. 눈이 내린다면 좋을텐데. 그럼 나는 로맨틱하다는 말을 할 것이다. 로맨틱하다고 느끼지 않더라도, 말이 가진 힘은 전과 다른 감정을 만들어주니, 당장 느끼고 싶은 감정을 말하고자 한다. 되도록이면.


눈이 내리면 세상이 자욱해진다. 멀리 건물이 흐릿해진다. 옷자락에도 눈이 쌓인다. 발에 밟히는 눈이 사박사박하다. 혹 물을 많이 머금은 눈이라면 머리가 금방 축축해질 거다. 물 맞은 강아지 꼴로 사무실에 들어오는 일도 가끔은 괜찮다. 따뜻한 공기에 머리를 말리고, 사무실 내 자리 옆 커다란 창문으로 펑펑 내리는 눈을 훔쳐 보겠지. 65도 자동 보온이 되는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담아 홀짝거리면서.


얼마전에는 출근길에 지하철로 한강을 건너고 있는데, 눈이 펑펑 내리면서 저 멀리까지 흐릿한 하얀색으로 가득 찬 것을 봤다. 눈 오는 겨울날에 한강길을 따라 집까지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이 조금 위험할 수는 있겠지만, 보사노바를 들으며 흥겹게 박자에 맞춰 뛰는 것도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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