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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 Dec 04. 2023

배추에 서리가 내렸다

배추에 서리가 내렸다. 서늘하게 식은 공기가 눈꺼풀에 맺혀 흘렀다. 해가 뜨고 볕이 따뜻하다고 느낄 때 겨울이 왔음을 실감한다. 이미 배추 수확이 시작되었는지 마트에는 절임배추 판매가 한창이었다.

우리 밭에는 한 주 늦게 심은 배추가 아직 땅에 서서 추위를 견디고 있다. 어떤 배추는 이미 속이 꽉 차서 함지박만 한데, 어떤 배추는 손바닥 크기에서 멈췄다. 같은 비료와 물을 먹고 자라도 성장 속도가 다른 작물을 볼 때면 기분이 오묘했다.


올해 7월쯤 새로 병아리를 들였다. 암평아리 다섯 마리에 수평아리 한 마리였다.

본래 키우던 수탉무리가 있어서 새로 수탉이 오면 합사가 불가하기 때문에 부러 암평아리를 데리러 갔다. 보통 계사는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다. 여름 열기로 달궈진 길을 한참 구불구불 올라 닿은 농장은 예상보다 작고 방역이 허술했다. 부모님 도움을 받아 겨우 닿은 곳이어서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병아리를 여기서 구하기로 했다.

한 마리씩 고르고 싶었지만 주인이 보지 못하게 가리고 뜰채로 닭장 안을 휘저었다. 그때마다 2~3개월 남짓된 작은 병아리들이 자지러지며 좁은 장안을 날아다녔다. 안쓰럽게 느낀 혈육이 "뜰채 말고 제가 직접 잡으면 안 될까요?" 하고 말했는데, 주인은 병아리는 손으로 잡으면 안 된다고 했다. 

"잡았다가 놓치면 다시 못 잡아."

그렇게 말하곤 뜰채로 잡은 병아리를 곧장 종이박스로 밀어 넣었다. 직접 병아리를 부화시키고 손발에 얹고 지냈던 우리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주인이 급히 상자를 덮고는 "열면 안 되니까 들고 바로 차로 가요!" 했는데, 영 이상해서 차에서 박스를 열었다. 아무래도 두 마리가 수컷인듯해 다시 돌아갔다.

"이 애는 수평아리 같아요."

"커보기 전에는 몰라요."

어느 정도는 맞지만, 수탉만 여섯 마리 길러본 입장에선 이 친구는 수평아리일 확률이 너무 높았다. 주인은 투덜대는 투로 두 마리를 바꿔줬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다. 혹시나 우리를 속이려는 행동인가 싶어 "저희는 수탉이 많아서 합사가 어렵기 때문에 수평아리는 데려갈 수 없어서 암평아리를 데리러 왔어요"라고 했지만, "수탉도 맛있어요"라는 원치 않는 답을 들었다.

"저희는 식용으로 키우는 게 아니에요. 만약 수평아리면 바꿔주세요."

물건으로 취급하고 싶진 않았지만, 경고하는 의미에서 말했다.

"예, 수평아리면 데려오세요."

하지만 그 주인도 우리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먼 곳까지 굳이 병아리를 데려와서 바꾸긴 어려웠다. 심지어 기르기 위해 데려간다면, 이미 수탉으로 완연히 자랄 쯤엔 정이 들어 보낼 수 없었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농장이나 시골에서 살다 보면 어린 게 약점이 된다. 보통 회사에서도 그렇듯 친절한 사람이 있는 반면, 어리숙한 면을 이용하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니 저러니 하는 사이 10월이 되었다. 역시 한 마리는 수탉이었지만, 다행히 한 마리라 암탉동에서 함께 키우기로 했다. 백봉 세 마리와 청계 두 마리는 어엿한 암탉이 되었다. 백봉은 청계보다 몸집이 작고 성장이 빠른 편이었다. 10월쯤부터 이미 알을 낳기 시작한 백봉이들과 다르게 청계는 알을 낳을 기미가 없었다.

그렇게 11월이 되어 백봉 중 머리털이 봉긋하게 오른 암탉은 포란을 시작했다.

이 겨울에 벌써 포란을 시작하면 병아리가 견딜 수 있으려나 걱정이 되었지만, 하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었다.

가장 활동적인 먹보가 곡기를 끊고 알만 품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모이나 물을 억지로라도 챙겨주지 않으면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천진하게 뛰어다니던 병아리가 병아리를 기르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묘했다.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어느덧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가 되었다. 포란하는 아이를 보니 그 친구가 어른거렸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밤낮으로 농담이나 나누며 함께 학교며 회사를 다니던 절친이었는데, 어느새 가정을 맡고 있었다. 첫째는 세 살이고, 둘째가 벌써 돌을 앞뒀다.

"얼마 전에 첫째 뒤집기 봤는데!"

문 앞에서 두 다리로 폴짝폴짝 뛰는 첫째를 보며 말했다.

"맞아 그랬지."

거실로 들어서자 사진 몇 장이 보였다. 첫째가 얼마 전 어린 집에서 김장을 하고 찍은 사진이랬다. 아이들이 성장한 만큼 견뎌낸 친구가 놀라웠다. 누군가 이 나이엔 "아이돌 보는 친구와 아이 돌보는 친구"로 나뉜다던 농담이 떠올랐다. 내 눈에는 우리 모두가 아직 어리고 어리숙해 보였는데, 친구는 다른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친구에게 키우는 닭이 알을 낳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중간중간 아이가 칭얼거렸다. 어찌할 줄 모르는 나와 달리 번쩍 아이를 안아 올리고 오물대는 말을 곧장 알아챘다. 어쩐지 2년 사이 많은 게 달라진 듯했다.

우리는 성격도 가치관도 반대였다. 특히 결혼과 육아는 정반대였다. 나는 나를 믿기 어려웠고 결혼은 더더욱 조심스러운 내 성향과 맞지 않았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모르겠지만, 결혼은 최대한 늦게 하고 싶어."

식탁 맞은편에 앉아있던 친구가 "그래 결혼은 늦게 해"라면서도 은근히 소개를 해주겠다며 여러 번 말했다.

"요즘 엄마도 비슷하게 굴던데"하자, 친구는 부모가 되어보니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엄마가 되어보니 왜 아이가 결혼하길 원하는지 알 것 같다고도 했다.

"그래도 난 아직 모르겠어."

종종 외로움을 느낄 땐 있지만 외롭다고 사람을 만나봤자 크게 데일뿐이라고 경험을 얘기했지만, 역시 서로 가치관이 달랐다. 덕분에 대화가 이어지고 새로운 지점을 발견하며 서로에게 자극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모르겠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내가 아직 어린 건가. 사람 관계도 책임도 잘 모르겠어. 지금은 이 정도가 맞아."

우리는 또 눈을 마주치며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다 퍼드득 소리에 놀라 돌아봤다.

검은 청계 두 마리가 닭장 주변을 날아다녔다. 얼마나 신났는지 온 밭 흙을 파내고 잡은 곤충을 서로 뺏고 도망가다가 다른 백봉에게 빼앗겼다. 그게 억울했던지 혼자 다른 곳에 서서 "까까"하고 까마귀 같은 울음을 뱉었다.

통통하게 털이 오른뺨을 움찔대며 청계 둘이 알을 품는 백봉이 주변을 기웃거렸다. 혈육이 뽕실을 위해 마련한 모이를 굳이 뺏어먹다가 뽕실에게 머리를 쪼였는데, 잠시 멈출 뿐 다시 밥을 먹으려 들었다. 머리를 쪼이면서도 뽕실 옆에 앉다가 돌기를 반복했다. 기웃대는 천진한 모습에 친구집을 방문해 쭈뼛대던 나 같았다.

"그래, 아직 노는 게 제일 좋지?"

금방 닭장을 뛰쳐나와 다시 온 밭을 쏘다니는 청계를 보며 말했다.


청계를 진정시키고 밭으로 나왔다. 하얗게 덮은 비닐 아래로 얼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시금치 싹이 파릇하게 비쳤다. 이미 성장시기가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시금치도 무도 배추도 며칠 사이 자랐다. 

'벌써 닭과 한 생활도 3년 정도 됐나.'

내 길을 찾겠다며 퇴사를 하고 K와 시골로 훌쩍 내려갔다가, 여러 문제로 다시 도시로 올라온 뒤 33km 떨어진 밭까지 출퇴근처럼 오간 지 1년이 흘렀다. 그 사이 방식을 바꾸려다 가치관 차이로 매일 다퉜다. 어찌어찌 전기라도 들여 변화를 꾀하려 했지만 아랫집(투기꾼) 방해로 또 무산되었다. 포기하려 들면 K에게 멱살 잡히듯 끌려왔고, 지금 같은 생활이 이어지길 바라면서도 끝장나길 희망했다. 막다른 길인가 싶다가도, 결국 길이 있다고 K가 말해서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다. 타인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3년간 새로운 삶을 모색해 온 생활 속에서 뭔가가 변한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지금도 이 생활이 완전히 옳거나 옳지 않다고 결정 내리지 못했다. 앞으로 나아가기에는 두렵고 물러서기에는 이미 뒤가 보이지 않았다.

시기도 방법도 목표도 성장방식이나 나라는 종에 대해서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배추도 시금치도 닭도 사람도 제 속도와 모습으로 커갔다.


그렇게 한창 겨울준비로 억새와 풀을 베어 계사 지붕에 얹는 사이 12월 초, 청계가 알을 낳았다. 아직 품기는 힘들었던 지 포란 중이던 백봉 옆에 탁란 하듯 낳아두곤 밖을 뛰어다녔다. 이번에도 한 마리는 곤충을 물고 한 마리는 뒤를 쫓으면서 사방을 헤집었다. 또 먹이를 뻇겼는지 한 마리가 "까까까"하고 우는 소리가 산을 타고 메아리쳤다.

시기도 방법도 성장점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배추도 닭도 사람도 제 속도와 모습으로 커가는 겨울, 또 혹한기를 이겨낼 준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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