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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일 Aug 20. 2020

#1. 상추와 바질을 키우면서 시작된 나의 작은 로망

반지하에서 옥상텃밭을 꿈꾸며

작은집 풀풀생활

#1. 상추와 바질을 키우면서 시작된 나의 작은 로망





합정과 상수 사이 골목 반지하에 월세로 산 적이 있다. 정확히는 월세의 월세

망원동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 취직한 뒤 처음엔 경기도에 있는 본가에서 왕복 4시간 거리를 출퇴근했다.

지옥처럼 길었던 사당역 퇴근길 버스 줄을 견디고, 새벽같이 일어나 버스 안에 잠들던 시절, 출근만 해도 너무 힘들어 급하게 들어가 살 집을 구해 들어가 살게 된 것이다.


돈 없는 자취생 (정확히는 보증금이라는 목돈)의 친구 '피터팬방구하기' 까페에 들어가 하우스메이트 구인 글을 뒤진 끝에 회사와 버스로 20분, 도보로 40분쯤 걸리는 반지하 투룸 작은방에 월세 27만원을 내고 지내게 되었다.  택배 몇 개에 짐을 실어 보내고, 필요한 짐은 트렁크에 싣고 출근길에 갔다가 바로 그 집에서 출퇴근을 했다. (왕복 4시간 출퇴근길이 정말이지 고난이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시간을 단축시키고 싶었다.)


내가 쓰는 방은 행거도 들어갈 공간이 없어 거실에 행거를 두고 살만큼 작은 방이었지만, 방에 꼭 맞게 짜인 전체 선반이 있어 수납도 편리했고, 곰팡이 하나 없는 방이라 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이사했던 계절이 한참 봄철이라 합정 골목에 흐드러지게 벚꽃도 피어있었고, 문 열면 펼쳐지는 핫플레이스들이 좋았다.


길가에 위치한 집이라 신호등이 가까워 밤이면 신호등 소리에 잠을 설쳤지만, 괜찮았다.

그만큼 버스정류장이 가까워 출근하기 편했으니깐


하우스메이트와는 나름 성격이 잘 맞아서 같이 장 봐서 된장찌개나 샐러드도 해 먹고, 커피메이커에 원두도 넣고 커피를 내려 마시거나 밤에는 와인을 나눠 마시며 수다도 떨었다. 놀다가 각자 방에 가서 자면 되니깐 세상 편했다.


상수 반지하집에 살던 시절 하우스메이트와 즐거운 한 때, 한껏 기분을 내서 차린 식탁


햇빛이 좋은 주말이면 하우스메이트는 선물 받은 작은 화분들은 밖에 꺼내놓고 햇빛을 보게 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평화로웠다. 나도 무언가 키우고 싶었다. 그때는 정말 식물에 무지렁이 일 때라 식물이라면 선인장 정도밖에 키워보지 않았을 때다. (그것마저도 죽이곤 했다.)



퇴근길 마주친 상추모종, 나의 식물생활의 씨앗을 뿌리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 망원시장에 들렀다가 4개 1000원에 파는 상추 모종과 마주하게 되었다!

상추라니!! 이 상추를 키우면 고기도 싸 먹고, 겉절이도 해 먹고 다 할 수만 있을 것 같았다.

주저 없이 사서 집으로 데려온 후 원추, 후추, 띵크어바추, 나이스투미추 라고 이름도 붙여주었다.


(2015년 페북 게시물 캡처, 위로부터 원추, 후추, 띵크어바추, 나이스투미추, 그리고 하이스메이트의 식물들)



모종을 화분에 옮기면서 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난생처음 흙은 어디서 사야 하지? 의문이 들었다.

망원동좋아요에 흙 어디서 파냐고 글을 올리니, 친절하게도 동네 옥상텃밭 모임에서 지렁이 배양토를 나눠주겠다고 답글이 달렸다.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밥을 포기하고 상추를 위해 지렁이 배양토를 받아왔다.


좋은 흙에 옮겨 담고, 물 주니 하루가 다르게 자랐고, 작은 포트화분에서 상추는 그저 높게만 자랐다.

나는 어쩐지 먹기는 무서워 먹지는 않았다. 분갈이를 해야 하는데,  지식도 의지도, 공간도 없던 터라 언젠가 나만의 옥상텃밭에 상추, 바질, 깻잎, 방울토마토 등을 잔뜩 키우리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 5년 뒤 나는 커다란 상자 텃밭 가득 상추를 키워 넘쳐나는 상추를 다 어쩌지?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상추가 초대한 벌레들에 의해 고통도 받고)



식물의 로망을 키워준 바질 모종, 반지하에서 꿈꾸던 킨포크 스타일  


그러던 어느 주말 마르쉐에서 바질 모종을 만났다. 파스타나 피자에 넣어먹고, 페스토로 해 먹어도 맛있다는 농부님의 설명에 홀린 듯 바질 모종을 데려왔다. 바질을 키워 파스타도 해 먹고, 이름도 생소한 바질 페스토를 해 먹는 꿈을 꾸었다. 언젠가 나도 킨포크 잡지에 나오는 새하얗고 넓은 식탁에서 내 손으로 키운 바질 페스토를 빵에 얹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직접 키운 바질을 넣어 토마토파스타를 준비하는 모습


다행히도 나의 꿈을 담은 바질도 쑥쑥 자라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몇 장 따서 토마토 파스타에 넣으니 어쩐지 근사하고 향긋한 맛이 났다.


외국 요리프로를 보면 파스타 하다가 "뒤뜰에서 바질을 조금 따다가 위에 얹어줍니다",  "정원에서 신선한 로즈마리를 잘라 넣어주세요" 이런 멘트를 보면서 바로 이런 순간을 기다려온지도 모른다.

나도 이제 할 수 있잖아! 파스타를 하다가 가니쉬로 바질 몇 장을 따서 얹으면 반지하 주방도 조금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이 때부터였을까? 바질에 대한 나의 집착과 사랑은


처음으로 나만의 옥상텃밭이 생겨 식물을 심을 때도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바질이었고,

인터넷, 동네 꽃집, 마르쉐 시장 등에서 바질 모종을 사다 심고, 바질 씨앗도 사다 한가득 뿌렸다.

나중에 직접 키운 바질로 바질페스토를 해 먹던 날은 드디어 하는구나! 하면서 내심 뿌듯했다.


바질로 시작된 식물에 대한 작은 관심으로 지금도 우당탕탕 즐겁게 식물과 함께 하고 있다.



(예고) #2. 식물 연쇄 살인마_빈 화분만 남은 나의 식물 도전기

키우는 족족 식물을 죽이던 나. 선인장도 죽이고, 페페도 죽이고, 허브도 다 죽이고...

선물 받은 화분들은 시체들이 되어 빈 화분들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늘 식물을 잔뜩 키우고 싶은 꿈을 가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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