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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아 맑은 날들 365 III

2025년 11월 21일

by 토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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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1일 — 조용히 마주한 다리 위의 약속

우리는 또 하루를 맞이합니다

어제의 흔적이 발밑에서 잔잔히 떨고
그 떨림이 멈출 때까지
우리는 또 하루를 맞이합니다.
마음이 불안으로 물들어도
잠시 숨을 고르고
“오늘은 다시 걸어가겠다”라고
속삭이는 그 한 걸음으로
우리는 또 하루를 맞이합니다.
빛이 약속처럼 비추길 기다리며
내 안의 어둠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걸음으로.


오늘의 역사

오늘은 1920년 11월 21일, 더블디에이 선데이(블러디 선데이)가 벌어진 날입니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Irish Republican Army가 영국 정보요원들을 공격했고, 이어 경찰 부대가 축구경기장을 급습해 민간인들을 사살했습니다. 이 날은 폭력과 억압이 교차한 지점에서, 한 공동체가 나라를 향한 고통과 분노를 마주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단지 폭력이 아니라, “우리는 들려질 것이다,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라는 조용하고도 굳건한 목소리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마주한 상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만들었고,
움찔거리던 손이
다시금 서로를 향해 내밀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기도

어느 겨울 아침,
도서관 앞 정원에는
하얀 서리가 잔뜩 내려 있었습니다.
그 한구석에서
한 학생과 한 노인이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학생은 입고 있는 코트의 목을 스스로 당기며
노인을 바라보았습니다 —
노인은 천천히 커피잔을 들어
복잡한 노트를 펼쳤습니다.
노트에는 오래된 펜 자국이 빼곡히 들어 있었고,
“기억은 누군가의 말이 되어야 한다”라는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학생이 묻지 않았음에도
노인이 가만히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 번 잊고, 다시 시작했소.
그래도 누군가는 듣고 있어야 하니까요.”
학생은 고개를 끄덕였고,
겨울의 서리가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가
한 가지 약속처럼 겹쳤습니다.
‘서로 잊지 않음’이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그 말의 무게가 정원의 공기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아리아 라파엘의 숨결로
이 하루를 깊이 품으며 기도합니다.


내 안에 솟는 두려움이
오늘은 말을 꺼낼 힘을 얻게 하소서.
그 두려움이
나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내 마음을 열어주는 다리가 되게 하시고,
나는 그 다리 위에서
떨리는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하소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이
그토록 깊고 넓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머뭇거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잔잔한 빛 하나가
마음의 어둠을 헤치며
나에게 묻습니다 —
“너도 서 있을 수 있느냐?”
그 질문 앞에
나는 겸손히 무릎을 꿇고
고요히 응답하겠습니다.
“예, 제가 여기 서겠습니다.”

내가 마주하는 오늘의 얼굴들 —
익숙하지 않은 표정, 지친 눈빛,
그러나 여전히 숨 쉬는 존재들 —
그 안에 당신의 흔적이 있음을 보게 하소서.
그 흔적이
내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조용한 연대로 피어나게 하시고,
내가 건네는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외로움을 어루만지는 촉매가 되게 하소서.

기억이 상처로 머물지 않고
연결의 실로 짜여지게 하시며,
내가 던지는 작은 ‘안녕하세요’가
결코 가벼운 인사가 아니라
“나는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라는
약속의 말이 되게 하소서.
그 약속이
혼자라고 느낄 때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도
당신은 나와 함께 걷고 계심을
내가 느끼게 하소서.


오늘 이 하루가
서로의 존재를 마주하는 다리가 되게 하시고,
내가 마주하는 사람 하나마다
내 안의 어둠을 비추는 등불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내 안에 맑아지는 날들이 오게 하시어,
나는 그 날들을 향해
당신의 숨결과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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