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는 학창 시절 내가 좋아했던 과목 중 하나였다. 아니 쉬웠던 과목이라고 해야 정확할 듯하다. 한국 지리거나 세계 지리거나 시험을 볼 때면, ‘이렇게 쉬운 문제가 고등학교 시험에 나온다고?’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나일강, 황하강, 인더스강...’을 밥상머리에서 늘 듣고 자랐기 때문일 거다. 엄마의 교육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발트 3국이 어디인지 몰랐던 내가 “발트의 길”을 엄마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89년 8월 23일 저녁 7시. 발트 3국의 시민들은 리투아니아 빌뉴스, 라트비아 리가, 에스토니아 탈린을 잇는 675.5km의 거대한 인간 띠를 만들며 함께 손을 잡고 외쳤다. ‘자유(LAISVES)’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는 각기 다른 언어를 지닌 독립 국가지만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소련의 점령하에 있었고, 독립과 자유를 외치는 인간 띠는 소련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자유와 독립이라는 가치에 대한 큰 울림을 전달한 것이 분명하다.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머물 때, 오다가다 여러 차례 지나쳤던 빌뉴스 대성당 광장 바닥에는 눈에 띄는 돌판이 하나 있었다. 한가운데 방위표시와 함께 S.T.E.B.U.K.L.A. 8개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엇인가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라 여겨 사진을 찍어 두었는데 그곳이 바로 ‘발트의 길’의 시작점이었고 그것을 기리기 위해 매립한 돌이었다. 8개의 문자는 리투아니아 ‘STEBUKLAS(기적)’이었다. 그 돌판을 밟고 세 번을 오른쪽으로 돌고 나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그것을 몰랐다니 아쉽기 그지없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엄마는 에스토니아 합창 축제 얘기를 꺼냈다. 5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라울루피두’얘기다. 에스토니아어로 ‘라울’이 노래이고, ‘피두’가 잔치라는 의미란다. 2019년에 라울루피두가 150주년을 기념하며 더욱 성대하게 열린다고 하니 엄마는 내심 1년 후에 에스토니아를 방문하고 싶어 했다. 1년을 앞당겨 이곳에 오게 되었으니 어쩌랴. 라울루피두가 열리는 장소라도 가 봐야겠다. 탈린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여장을 푼 후, 버스로 세 정거장 떨어져 있는 ‘Song Festival Grounds’로 향한다.
그곳에 도착할 무렵 무거워진 구름이 비를 흩뿌린다. 이번 여행 중 처음 보는 비다. 바로 옆에 있는 발트해의 수분을 머금은 비일 것이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무대 아래에 큰 트럭이 와 있다. 시설 보완 중인 듯하다. 기분 좋게 무대 위 돔 형의 지붕 아래 계단으로 올라가 비를 감상한다. 잠시 후 구름은 흩어지고 본연의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저 비탈진 연둣빛 언덕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합창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그려본다. 최대 2만여 명의 합창단이 동시에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며 그것을 보기 위해 7만 명의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는데 지금 이곳에 오직 엄마와 나 둘뿐인 듯하다.
우리는 눈부신 하늘빛 축복 속에 드넓은 잔디밭 관객석을 걷는다. 그리고 그 끝에는 동상이 하나 있다. 에스토니아의 제2의 국가로 일컬어지는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을 작곡한 구스타프 에르네삭스(1908~1993)다. 공연장을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의 옆에 기대어 1960년, 소련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오른 에네르삭스의 지휘에 맞추어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을 떼창하며 라울루피두의 피날레를 장식했던 수만명의 에스토니아인들을 상상해 본다.
수만 명의 에스토니아인들과 조우한 상상속의 감동을 안고 엄마와 나는 그곳을 빠져나와 발트해를 향해 걸어간다. 발트 3국. 바로 그 주인공 ‘발트해’를 여행의 끝자락에서 드디어 만난다. 그 푸르고 투명한 일렁이는 빛 속으로 엄마와 나는 첨벙첨벙 걸어 들어간다. ‘아!! 내가 발트해 속에 들어와 있구나. 엄마와 함께.’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 아빠를 향해 모래 위를 달려가고 있던 어린 형제의 모습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