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감옥
우리는 오늘도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불안과 비교심을 포장해 아이에게 건넸다.
지금도 나 역시 완벽한 엄마는 아니지만
조금 더 늦기 전에 이 이야기를 쓰려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는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라는 걸.
어른이 멈추고 바라볼 때,
비로소 아이들은 스스로 길을 걸을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개씩 학원을 전전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온다.
촛농처럼 녹아든 아이의 얼굴에 우리는 말한다.
“빨리 밥 먹고 숙제해야지.”
“이건 다 너를 위한 거야, 힘들어도 미래를 위해서 해야 해.”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대학에 못 가.”
그 말은 봄날에 피어오른 새싹 같은 아이에게
칠흑 같은 어둠을 심는다.
자신도 모르게 각인된 두려움.
그 두려움은 사회 전체에 퍼져있고,
이제 막 서툰 우리말을 떼기 시작한 아이에게
‘모국어는 영어’라는 착각까지 씌운다.
그리고 그렇게, 초등학생 때부터
아이들은 레벨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학원에 들어가는 것도 경쟁이고,
성적에 따라 가능성과 자존감이 함께 결정된다.
그리고,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제일 먼저 무너지는 건,
아이가 아니라 엄마다.
엄만 “어떡하니…” 하고 깊은 한숨과 함께
아직 닿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울고,
떨어진 체면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그걸 본 아이는 미안한 듯 엄마 눈치부터 살피며
“나는 열심히 했는데…” 속삭이듯 말한다.
이 또한 변명처럼 들릴까 봐, 그 말조차 삼킨다.
엄마의 분통에 밀려,
자신의 노력마저 가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노력한 마음은 묻히고,
실패한 결과만이 아이의 얼굴에 새겨진다.
그러나 슬퍼할 새도 없이, 아이는 다음 레벨 테스트를 위해
오늘도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 풀지 못한 공부를 한다.
요즘의 학교는 배움의 공간이 아닌지가 오래다.
선생님은 학생을 깨우길 주저하고,
학생은 선생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무너진 교권과 절대적인 학생 인권 사이에서
진짜 교육은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공백을, 스마트폰이 메운다.
스마트폰은 단순히 아이들의 여백을 채우는 도구가 아닌,
부모가 줄 수 있는 조용한 보상이자 아이들의 친구다.
부모가 핸드폰을 허락해 주는 이유는
빡빡한 학원 스케줄을 소화해 낸
아이들에게 주는 위로이자 자유이다.
하지만 그 위로는 반복될수록 의존이 된다.
아이들은 점점 스마트폰에 감정을 기대고,
가상의 즐거움이 일상의 유일한 위안이 되어 버린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흐려지고,
감정은 표현되지 못한 채 쌓인다.
결국, 분노조절장애나 감정단절 같은
묵직한 사회 문제까지로 이어지고 있다.
아이들은 그렇게 감정도, 생각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그때 문득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요즘 애들은 왜 저럴까?’
'무엇이 문제 일까... '
그리고 그 질문 끝에는 늘 같은 답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결국, 부모의 양육 방식이었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며 아이의 감정을 무시하고,
당하고 살지 말라며 분노를 허락했고,
이겨야 한다는 명분 아래 공감을 싹 지워버린다.
성적과 승부로 사랑을 증명하려 했던 우리의 방식이
결국, 타인을 공격하거나 무시하는 괴물을 만든 것이다.
우리 아이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우리는 아이를 지킨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은, 조금의 실패도 견디지 못하도록,
조금의 불편함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도록
아이를 길들여왔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아이의 친구까지도
엄마 입맛대로 고르고 골라 어울릴 수 있게 허락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사회성까지도 부모가 모두 설계한 것이다.
어릴 때는 엄마가 해주는 게 편했다.
학교 일정도, 숙제도, 준비물도 전부 엄마가 대신했다.
하지만 그렇게 자란 아이는
나중엔 스스로 뭘 해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아니, 모른다.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어른.
결정을 두려워하고, 책임을 미루고,
무기력 앞에 주저앉는 몸만 큰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결국 우리가 길들여 만든 또 하나의 괴물이
그렇게 탄생하는 순간이다.
사랑이라는 감옥.
우리는 아이를 보호한 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격리한 건 아닐까.
현실을 알려주는 대신,
모든 돌부리를 치워버려
결국, 아이 스스로 넘을 수 있는 계단조차
어른이 먼저 들어 올려버린 건 아닐까.
우린 아이에게 행복을 만들어가는 방법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 채,
그 아이를 세상 속 외톨이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무엇이 자신을 웃게 하는지조차 모른 채 자라난 아이.
그 아이는 결국, 세상이 아닌,
엄마의 시선만을 바라보는 바보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나는 그래서 사랑은 통제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사랑은 살아 있는 존재자체를 바라보는 일이라는 걸.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알리고 싶다.
사랑은 절대 길들임이 아니어야 한다.
지금 당신의 아이는 살아있는가?
아니면, 조용히 인형처럼 길들고 있는가?
그리고 나 역시, 아이들로 하여금
진짜 사랑을 다시 배우고 있는 중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우리가 멈춰 서면, 아이들은 다시 홀로 걸을 수 있다.
우리가 조용히 바라봐주면,
아이들도 자기 삶을 바라보기 시작할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희망이다.
우리가 변하면, 아이들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안다.
공부도 경쟁도 피할 수 없다는 걸.
하지만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공부를 시킬까, 말까”가 아니라 ,
“누구의 꿈으로 공부하게 할 것인가?”이다.
내가 못 이룬 꿈을 우리 아이가 대신해 이뤄내는 게 아닌,
아이가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는 잠시 멈추고,
그저 바라보며,
함께 손잡고 걸어줄 어른이 되어 주기만 하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사랑은 통제가 아닌 믿음으로.
그리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괴물은 저절로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걱정이라는 명분으로,
우리는 스스로 괴물을 빚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사랑이 만든 괴물은
때론,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피해는,
마침내 내 아이의 얼굴 위에도 떨어졌다.
어느 날, 나에게도 괴물을 마주해야 하는 날이 찾아왔고,
그날, 아들은 뺨이 부은 채로 조용히 집에 들어왔다..
말보다 오래 남는 감정을 씁니다.
각기 다른 시선에서, 당신의 마음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이야기로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