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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유선생 Jul 15. 2022

딸을 바라보며

“아빠, 모기가 아파.”


네 살 난 딸애가 포동한 얼굴을 앙증맞게 찌푸리며 안겨온다.


“뭐? 모기가 벌써 나왔어?”


잠짓 딴전을 피우자,


“모기가 아니고 목이가 아프다고.”


아이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 목을 만져 보인다. 감기에 걸려서 며칠 기침을 해대더니 목이 아픈 모양이다. 아빠가 국어 선생이라서 그런지 아이는 문법개념이 철저하다. 그래서 모든 말의 주어에는‘가’란 주격조사를 붙여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팔이가 아파.”


“연필이가 없어졌어.”


하는 식의 표현을 쓰곤 한다.


얼마 전 자전거 앞에 아이를 태우고 태인도 쪽 바닷가로 바람 쐬러 간 적이 있다. 아이들 몇이 신발을 벗어서 바닷물을 퍼 나르며 놀고 있었다.


“아빠, 나 수영할래.”


지난 여름 백운산 수영장에서 놀던 생각이 났나보다. 2월이라 두터운 옷을 입고 모자까지 뒤집어쓴 채로 하는 말이 재미있어서,


“그래, 다은이 수영해봐.” 하며 웃었더니,


“응, 옷 벗고”


하면서 좋아라 점퍼의 지퍼를 내리는 것이었다.


막내딸답게 애교가 많고 재롱을 잘 떨어 우리 부부는 아이가 귀찮아할 정도로 자주 안아주고 뽀뽀를 해주곤 한다. 하지만 딸애를 바라 볼 때마다 문득문득 가슴속을 헤집고 지나가는 ‘싸’한 아픔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그건 아이에 대해 지고 있는 죄스러운 기억 때문이다.


4년쯤 전 아내가 몹시 아파 며칠동안 약을 먹은 적이 있었다. 우리에겐 그때 세 살 된 딸이 하나 있어, 하나만 키울까, 하나 더 낳을까 의논 중이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임신이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이라 약 때문에 기형아를 않게 되지나 않을까 불안했고 더구나 초음파 검사로 여아란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아주 심각하게 유산을 고려했다.


몹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급기야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인공유산을 받기 위해 부산에 있는 처의 언니 집으로 찾아갔다. 결국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며칠 동안 고민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지만 그때의 그 참담한 심정이란..... 그리고 혹시나 하던 기대가 역시나 하는 실망감으로 이어지던 아이가 태어나던 날의 심정도 우리는 죄스러운 느낌 없이는 떠올리지 못한다.


부모의 이런 부끄러운 행동이나 심정이 아이의 영혼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일까? 첫째에 비해서 둘째는 유난히 병원 출입이 잦았다.


아이가 20개월쯤 되었을 때, 저녁부터 먹는 대로 토하면서 심하게 울어 밤새 달래다가 새벽녘이 다 되어 형님 차를 불러서 병원 응급실로 갔다. 의사가 진단을 해 보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순천의 그 병원에서는 한참이나 치료를 하더니, 장이 꼬여 죽을 위기를 넘겼다고 하였다.


계속 링거 주사를 맞으며 사흘동안 입원해 있었는데, 머리에 꽂아둔 주사바늘이 빠질까봐 우리 부부는 잠도 못 자고 아이를 지켜보며 밤을 새웠다. 병원에서 생활하면서 우리는 많은 반성을 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의 종아리에 하얀 반점이 생겨서 주위에 물어보았더니 여간해선 낫지 않는 백반점이라고 했다. 여기 저기 병원을 찾아다녀도 낫지 않아 기도도 많이 했다. 의사가 신 음식을 먹이지 말라고 해서 포도나 케첩 같은 음식들은 우리 식탁에서 자취를 감췄다.


한 송이 정도는 금방 먹어치울 정도로 포도를 좋아하던 아이가 이제는 어쩌다 포도를 보면,


“엄마, 나 다리 안 아프지?”


하면서 조심스레 한 알을 집어 들곤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아이에 대한 사랑을 키워놓았을까? 아내는 가끔 첫째보다 둘째에게 더 애정이 간다고 말한다. 딸 아이 둘이서 하루 종일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엄마, 아빠 소리를 흉내내는 것을 들으며, 학원이나 교회에서 배워온 재롱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서 저 귀한 생명을 지켜준 신께 감사하곤 한다.


둘째는 주위 사람들이 큰애 이름을 따서,


“다경이 엄마”


하고 부르는걸 많이 들어서인지, 말할 때 “다은이 엄마”, “다은이 아빠”를 자주 덧붙이곤 한다. 아이의 무의식 저 깊은 곳에 말살 당할 뻔했던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본능이 작용되고 있다는 증거일까?


한 인간의 존재가치는 전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현실적인 삶 속에서 그것을 한낱 교과서에나 나오는 낡은 지식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만다. 매일매일 낙태수술이란 이름으로 살인행위가 얼마나 수없이 자행되고 있으며 더구나 초음파 검사에 의해 뱃속에 든 아이의 생사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잔인함이란....


언젠가 박완서의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이란 작품을 눈시울을 붉히면서 읽은 적이 있다. 작가는 낙태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자궁 안에서 끊임없이 지르는 태아의 절규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한번 자기 자녀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자. 제 자식이 아무리 못났다고 할지라도 세상 어느 부모든,


‘저놈 뱃속에 있을 때 떼어버렸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겨우내 누런 외투를 뒤집어쓰고 엎드려 있던 풀들이, 따스한 봄의 햇살을 먼저 보려고 다투어 연초록 얼굴들을 내밀고 있다. 언제 보아도 생명력이 넘치는 귀여운 새싹들은 뽀뽀를 기다리는 아이의 얼굴과도 같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뽀뽀해줬더니,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을라치면 딸애는 달려와서 “아빠, 뽀뽀.”


하면서 눈을 살포시 감고 입술을 뾰족 내밀곤 한다.


오늘은 휴일이라 글을 쓰다가 아이를 불렀다. 살짝 안으며,


“다은이, 아빠랑 뽀뽀.”


그러자 딸애는 눈이 샐쭉해지면서 응석부리듯 말한다.


“아빠, 학교도 안 가면서 왜 뽀뽀를 하자고 그래?”


나는 다시 한번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창 밖으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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