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결혼 정년기는 좋은 연애 상대, 결혼 상대에 대한 기준이 없어서 대혼란 대환장이 었다. 나를 몰랐는데 누굴 알아봤겠으며, 나를 사랑할 줄을 몰랐는데 누굴 사랑했겠는가. 그랬던 내가 이제 나이가 조오금 들었다고, 젊은 친구들 사정은 조금 더 보이고 조심스레 훈수도 두는 지경에 왔다.
한 번은, 비슷한 시기에 2명의 30대가 '결혼을 하는 게 맞을까요'라는 고민을 얘기했다. 한 명은 상대와 성향도 유머코드도 잘 맞고 배려와 이해도 넘친다. 이런 사람 만나기는 어렵겠다는 것도 알겠단다. 다만, 결혼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두렵다고 했다. 또 다른 한 명은 결혼을 하긴 하는데 '결혼 언제 하냐'는 주변의 반복된 질문에 화와 짜증이 가득했다. 그는 '때가 되면 이거 해야지, 저거 해야지' 식의 세상 기준에 대한 갑갑해했고, 자기 삶을 이리저리 휘두른다며 세상을 탓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기준에 굴복하는 자신에게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의 결혼이 그 분노에 휘말려 냅다 지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상 탓과 좌절감에 휩싸인 남자와 그 남자의 불같은 분노를 열정으로 착각하고 말려든 여자가 위험해 보였다.
첫 번째 후배에게는 결혼의 장점, 특히 순수했던 시절을 함께 추억하며 나이 들어가는 삶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두 번째 후배에게는 결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쉽게 결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한 번쯤 넘어지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결정을 하면서 세상에 대한 원망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고 하였다. 두 후배는 서로 친하지는 않지만 아는 정도는 되었기에, 만약 나에게 들은 이야기를 나눴다면 갸우뚱했을 것이다. 똑같은 결혼 상담을 했는데, 완전히 다른 답을 했으니 말이다.
어릴 때 학습지에 종종 선긋기 문제가 있었다. 어울리는 문장을 서로 연결하라거나, 빈칸에 맞는 답을 적으라는 식이었다. 각 문장은 정확히 각자의 답이 있었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 그렇게 깔끔한 선긋기 식 답이 있더라도, 찾기가 어려운 이유는 질문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결혼을 하는 게 맞을까요?라고 똑같은 질문을 했지만, 명확한 의미가 각자 다르니 답이 달랐던 것처럼 말이다.
삶의 여정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질문을 찾는 것이 아닐까?
내가 던지는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답을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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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명확해지면 질문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