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뽈삐래 Jul 22. 2022

트레일러에 살다

 우리는 결국 해냈다! 연어 공장 취업 성공을! 본격적인 집 구하기가 시작되었다. 공장과 가까운 휴온빌로 가야 했고, 이곳은 인구 2천7백여 명이 사는 시골이자 유동인구가 없는 곳이어서 하우스 렌트나 셰어하우스를 찾기 힘들었다.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적어 집을 (혹은 방을) 구한다는 공고를 검트리에 게시했다. 검트리는 호주 내 집 렌트부터 중고물품 거래, 구직까지 도시 정착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있는 호주 생활 필수 사이트이다. (https://www.gumtree.com.au/) 게시글을 올리고 며칠 후 메시지를 받았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트레일러에 살아볼래?’

호주 휴온빌_거주지가 된 트레일러
호주 휴온빌-우리 집 앞마당

생활하기에 적당한 크기, 직장과 가까운 위치, 와이파이, 수도, 전기 등 기타 모든 비용이 포함된 주당 1인 6만 원이라는 저렴한 숙비 그리고 트레일러라는 신박한 주거공간. 거부할 수 없는 완벽한 조건 아니겠는가.


 몇 가지 트러블 아닌 트러블이 있었는데 하나는 화장실 및 샤워실이 트레일러에는 없어서 집 안에 있는 걸 집주인과 같이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마당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문 바로 옆에 위치해 있고 집주인과 생활 패턴이 정반대여서 시간이 겹치는 일이 없었으므로 패스. 그럼에도 새벽 5시에 캠핑카 밖으로 나가 화장실에 가서 세수하는 건 매우 귀찮았고 가끔 그의 18금 생활을 본의 아니게 듣는 경우가 있었다. 비몽사몽 했던 그날 밤 번쩍 정신 차리게 만들었던 그 사운드에 화장실을 갈까 말까 고민을 하기도 했었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얼굴이 빨개지네.


 두 번째는 와이파이. 애초에 와이파이 및 집 전화를 두지 않아 케이블 연결부터 해야 했고 이곳은 일 처리가 느리다는 호주, 게다가 여기는 더더욱 느린 깡 시골 휴온빌이므로 애초에 약속했던 2주가 걸린다는 와이파이 설치는 두 달이 걸렸다. 와이파이가 없는 덕분에 우리는 추억의 100 빙고도 하고 도서관에서 론니플래닛 책을 빌려 여행 계획을 세웠다. 도서관이 문을 닫으면 도서관과 최대한 가깝게 신문지를 깔고 앉아 도서관 와이파이를 사용했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가 도서관 앞에 쭈그려 앉아 무한도전을 보았던 일요일 오후가 생각이 나네.


 세 번째는 겉모습만 귀여운 개 망나니 같은 염소 새끼. 그의 이름은 그레용. 우린 캣챠 크래용이라고 불렀는데 한번 머리를 긁어준 후로 이노무시키가 우리를 서열 상 자기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무지 막지 하게 괴롭혔다. 저 멀리서부터 우릴 향해 뿔을 쳐들고 돌진하는데 성난 황소가 들이받는 줄. 우리 집 트레일러에 그렇게 들어오고 싶어 하더니 결국 침대까지 점령하고 말았다.


 그래도 좋았다. 우리의 삶에 매우 만족했다. 특히 문을 박차고 나가 정원에서 매일 밤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았다. 가만히 앉아 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밤하늘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황홀했다. 매일매일 크기와 형상이 다른 달을 감상했고 가끔 찾아오는 별똥별과 금성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우리 집 앞마당이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이전 02화 호바트의 백수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