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도상국이니까 이 정도면 되겠지?
그랬다. 우리는 정말 단순했다. 2012년에 처음 만나 1년여간의 연애를 한 뒤, 양가 허락을 받고 결혼을 결심한 우리들은 2013년에 예쁜 딸을 낳고 나름대로 열심히 진짜 힘든 티 하나 없이 살아왔던 것같다. 신랑은 내가 임산부때부터 택배업에 뛰어들었고 밥도 굶어가며 최대한 빠르게 배송을 마친 뒤, 퇴근을 빨리 해서 나랑 늘 같이 밥을 먹었고 늘 내 건강을 잘 챙기느라 바빴다.
그때는 둘 다 젊었으니까 아이가 있어도 힘든거 하나없이 매일 매일을 즐겁고 재미있게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기를 수년째, 아이가 한국나이로 5살이 되던 해, 우리집은 신랑이 과거부터 가지고 있던 빚때문에 점점 금전적인 문제가 발생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부싸움 한번없이 잘 지냈다. 시댁에서는 이런 우리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교회를 나오라고 강요를 했고 거기에 헌금까지 매주 수십만원을 강요했다. 진짜 미칠 노릇이었다.
결국 우리는 나름대로의 잔머리를 굴려보고자 해외살이를 선택하게 됐다. 어쩌면 도망자의 삶으로 전락하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우리에겐 별다른 선택지는 없었던 것 같고 사실 도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색은 안했지만 일을 하는동안 나도 신랑도 너무 힘들었던건 사실이었고 이렇게 살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역을 바꿔 이사를 갈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던터라 오히려 해외로 나가서 새로운 삶을 도전해보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시댁에서는 당연히 반대를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특히나 종교 강요자들이었던 시부모님은 나를 마치 죽일사람처럼 대했고 (원래도 잘 대해주진 않았다) 행복하지 못한 이별을 한 채, 남미 페루로 국제 이사를 가버렸다. 사실 나는 한편으로는 마음이 매우 편했다. 형님에게는 다소 죄송했지만 (지금은 이혼하셨음) 한국번호를 정지시키고 출국을 했던지라 내가 연락을 하지 않는 이상 나한테 연락을 하실 수 없다는 생각에 시댁에서의 홀가분함도 나름 많았던 것 같다.
2017년 호기롭게 장거리 비행을 마친 뒤, 도착한 남미 페루의 첫 공기는 매케하고 매연이 상당히 많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공항 주변에는 많은 노숙자들이 있었고 인터넷을 찾았을 때의 기억들을 더듬어서 되도록이면 비싸도 공항 안에 있는 택시를 타라는 글들을 지키기로 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었고 생면부지 스페인어는 단 한 마디도 못하던 그때, 우리 세 가족은 말도 안되는 남미 페루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 주머니엔 3,000만원이라는 든든한 금액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