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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시련, 한인의 주적은 한인?

널 믿었던 만큼 내 신랑도 널 믿었기에.....

by 다정한 똘언니

사실은.. 진짜 미련하고 바보 같은 소리일 수 있다. "어머 저 사람들 아무래도 미쳤나봐" 할 수도 있을법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사실 남미 페루로 처음 갈 생각을 했던 이유는 몇 가지로 간추려 볼 수 있다. 그 이유란 무엇이냐!


1.한국이랑 거리가 상당히 멀어서(아무때나 오고 싶다고 해서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님)

2.K-POP의 엄청난 유행지라 한국에 대한거라면 뭘 해도 성공할 것 같았음.

3.개발도상국이고 물가가 워낙 저렴해서 진짜 소액으로 창업이 가능할 것 같았음.


정말 딱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한국의 모든것들을 정리하고 급하게 도망치듯이 남미 페루로 향했던 것이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들이지만 어쩌면 또 말이 되는 이유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전혀 아닌 이유는 아니니까.. 아무튼 그 시절의 나와 김오빠는 5살배기 어린 여자 아이를 데리고 그 머나먼 곳으로 비행시간만 24시간이 넘는 거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페루에는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민이라는걸 결정하기 전에 네이버에서 운영되던 이민카페에 가입을 한 적 있었는데 그때 카페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제법 많이 만났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한인 자식을 만났다. 그 카페에서..


그 사람은 정말 달콤한 말로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자기가 사는 곳이 남미 페루에 있는 우앙까요(Huancayo)라는 지방도시인데 어짜피 이민을 생각하신거라면 그쪽으로 와보시는걸 추천한다는 그런 내용들의 추파. 어짜피 우리는 그 사람이 아니었어도 남미 페루를 생각하고 있었던지라 처음 사전답사때 페루를 간김에 한달살이를 하기도 했었다.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바게트빵 하나에 한국돈으로 300원이면 살 수 있고 물론 그 외의 음식들은 대단한 어떤 음식은 없지만 그래도 정말 저렴한 물가로 살아갈 수가 있어서 돈에 대한 큰 부담이 없었던건 사실이었다. 지방도시지만 대형마트를 들어가면 신라면을 판매했고 보통은 아시아 사람을 보면 "니하오"를 먼저 외치지만 어설픈 스페인어로 "꼬레아"라고 하면 미안하다는 말을 듣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사실 꼬레아 라고 하면 노르떼? 수르? 가 나온다.. 북? 남?)


우앙까요로 정착을 해볼까? 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고 처음에 집을 구하기 전에 모텔, 즉, 한국 버전으로 따진다면 여인숙같은 공간을 일주일 정도 대여를 했다. 그리고 그 안에 우앙까요로 와보라 했던 그 한인과 교류를 시작했다. 같이 시간이 될때마다 집을 찾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그 분이 운영하는 그 지역의 유일한 한식당인 그 분 식당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분이 운영하는 식당은 손님이 많지 않았다. 부인이랑 같이 운영을 했는데 부인은 약대를 다니시다 한국인을 만나 학교를 그만두고 아이를 낳고 같이 요식업에 종사중이라고 했다. 와이프네 건물에서 식당을 운영중이라서 간판도 없고 진짜 최악의 상태로 운영중이었지만 그래도 돈 안 들이고 손쉽게 운영을 하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또 한가지 신기했던건 본인이 장부를 작성했었는데 그 장부에 있는 숫자들을 모두 한글로 적는다는 것이었다. 380sol이 아니라 삼백팔십솔 이라고 한글로 정직하게 꾹꾹 눌러 글씨를 쓰곤 했다. 여권은 어디 숨겨놨다고 한다. 그땐 몰랐다. 이유를..


하지만 우리들에겐 정말 다정다감하게 잘 대해주셨다. 아무래도 그분은 한국에 오랫동안 들어가질 않아서 한국어로 이야기를 할 사람이 분명 필요했던 것 같다. 거주를 위해서는 그 나라 비자가 합법적으로 필요한데 그 비자까지 해결을 해주겠다고 선뜻 도움의 손길을 뻗어줬었다. 그 말을 믿으면 안됐었는데 말이지.. 우앙까요에 있는 어학원 중 유일하게 한국어 수업이 있는 어학원이 있었다. 그곳에서 임시지만 한국어 교사로 재직을 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마쳤다고 했었다.


우앙까요에 도착을 했을 때, 내가 한국에서 손만두를 조금씩 만들어 팔았던 내용을 알고 있던 그 사람은 만두찜기가 그 시골에는 찾기 어려우니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만두찜기를 직접 제작하자고 제안을 했었다.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을때였고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 국가의 지방이라서 더더욱 의지를 할 곳이 필요했던 우리들은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했다. 만두찜기가 있으면 사실 그 지역 시장인 일요시장에 나가서 일주일에 한 번씩만 장사를 하더라도 넉넉한 매출을 기대할 수 있을거라는 계획이 나름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만두찜기, 사실 그 분도 잘 하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더듬더듬 열심히 시도를 했는데 사각형의 4단짜리 스탠으로 듬성듬성 완성이 된 찜기같은 찜기아닌 찜통같은 그런게 완성이 됐다.사실 여기저기 김이 너무 새서 올바르게 사용을 하려면 직접 땜질을 해야할 수준이긴 했다. 그런곳에 우리는 400솔이 넘는 돈을 투자했다.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짜피 우리 사업의 일환이 될거였으니까..


일요시장에 대한 승인을 받기 위해 자리를 알아보러 시내로 외출을 했었다. 처음에 같이 힘내보자고 본인도 일요시장까지 함께 나가 오전장사를 함께 시너지 내서 해보자고 했던 그 한인은, 실제 일요시장이 가능해질 것 같으니 점점 발을 빼는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시청에서 허가를 내주려는 신호를 조금씩 보이자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고 매출도 없는데 잘 됐다던 그 한인은 아이를 봐야한다는 둥, 명의 문제를 언급하고, 평일에 한국어 교사로 일 하면서 장사할 수 있겠냐는둥 별의별 말을 다 하면서 뭔가 하기 싫다는걸 온몸으로 내뿜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그 사건이 터졌다.

리마로 돌아와서 한달에 800불짜리 가게에서 열심히 장사를 했을 때, 할로윈이 돌아왔다.
믿기 어려운 분들은 패스해도 좋다. 하지만 내가 페루에서 팔던 대왕돈가스 정식이다. 내가 만든거다.
조키 플라자 라고 하는 대형 쇼핑몰에서 지금은 훌쩍 커버린 그때는 작었던 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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