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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사를 방해했던거라고?

그 한인은 우리를 방해하고 있었다.

by 다정한 똘언니

페루 우앙까요에 도착한지 한달이 되어가는 시점에 공사장같은 거친 집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도저히 안되겠어서 리마에 유일하게 있는 지인을 통해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과 함께 이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사하는 당일날까지 한인이 자기 가게를 내팽개치고 우리한테 득달같이 쫓아와서 계속 볼멘소리를 했다는게 너무 신기한 일이었다.


도대체 저 사람은 무슨 심리길래 왜 저러는걸까? 이런생각이 들었을때쯤.. 문득 그 사람이 자기 부인에게도 똑같이 볼멘소리를 하는걸 듣게 되었다. 정말 황당하게도 질투에서부터 시작된 볼멘소리였다. 그 한인도 사람인지라 본인도 천장이 있고 바닥이 깨끗한 그런 집에서 살고싶었던 꿈이 있었나보더라. 그런데 와이프는 페루 현지인. 그것도 이 지역 토박이. 집에 대한 큰 걱정이나 스트레스가 없었던 것. 그 사람과 부인, 아기 한 명이 살아가던 곳은 가게 안에 작은휴식공간이었는데 그 곳에 매트리스를 하나 가져다놓고 셋이 같이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집이나 돈이 없어서 그런게 아니라 그 가게가 있는 건물은 부인네 아버지의 건물이었고 그 윗층으로 한 층 전체를 딸의 집으로 내주려 했지만 공사가 덜 끝난 관계로 사용을 하지 못하고 있던 것 뿐이었다. 페루사람들의 특징 중 한가지는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면 생활비를 제외하고 남는 돈으로 벽돌과 시멘트를 사서 집을 한 달에 한번씩 증축을 시킨다는게 특징이다.


이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아버지 연세가 많으시지만 일을 다니는 분이고 그분 역시 한달 일하고 가족들과 돈 모아서 벽돌과 시멘트를 일부 구매하고 셀프로 자기 집 건물을 올리거나 집 내부를 건설하는 등 그렇게 집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 내 집이 없다는 것. 우리가 며칠간 지내던 공사장도 마찬가지다. 이모부와 이모에게 준 건물이라서 그 분들이 월급을 받으면 벽돌, 시멘트를 구매해서 셀프로 계속 집을 지어야만 공사장에서 집으로 변하는 것이다.

페페루1.jpg 이삿짐들을 실고 옮겨주는 것까지 원화로 인당 15000원. 인건비 진짜...

이사를 하는 당일, 매트리스도 구매를 했고 짐은 이미 늘어났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던 우리들은 한국어를 하는 현지인 도리스와 함께 아침 일찍부터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인도 물론 나와서 거들겠다고 알짱거렸다. 그러면서 은근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근데 그런 집으로 가시면 월세부터도 차이가 날텐데 어떻게 사시려고 그래요? 저야 가게라도 하니까 하루에 몇만원이라도 버니까 모아서 그런집 살면 월세 낼 수 있는데 두 분은 직업도 없는데 어쩌려고 그러세요?


나는 대답했다.

-저희 들어가는 건물의 아랫집이 비었대요. 한국인 좋아하시니 00씨도 가족들과 상의하셔서 아이랑 좀 밝은곳으로 나오세요. 말씀하신것처럼 돈 버시니까 저희보다는 월세 내시기 부담 덜하지 않으실까요? 방 한 칸에서 아이랑 같이 있는거 힘들어보이시는데.. 집 다 지을때까지는 밖에서 월세로 살다가 들어가세요.


그 말이 그 사람에게는 긁히는 소리였던 것. 그랬다. 질투였다. 우리가 돈이 있던 없던 그걸 다 떠나서 본인도 그 가게에서 방 한칸짜리, 침대 하나에서 덩치 큰 사람 셋이 같이 지내는게 너무나 싫었는데 그걸 견디지 못하고 우리에게 폭발을 했던 거였다. 안타깝긴 했지만 사실 그것도 본인이 선택을 한거라서 뭐라고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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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어느나라에서 거주를 하던 늘 방바닥 청소를 알차게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청소도구부터 구매를 해서 쓸고 닦고를 7~8번 정도 반복한다. 그러면 맨발로 다녀도 될 정도로 찌든때가 사라지는 마법을 구경할 수 있다. 그리고 가구거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손짓 발짓을 하면서 가격을 흥정하고 또 깍아서 조립식 옷장을 하나 구매했다. 배달은 돈을 안 받고 그냥 가져다 주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그건 참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지금도 그러겠지?


설치를 해주는건 없으니까 드라이버 하나 들고 나 혼자서 조립을 하고 설치하면 된다. 그냥 조용히 앉은자리에서 천천히 하나하나 조립을 하다보면 어느새 완성이 되어 있다. 하지만, 완성품이 뭔가 좀 어설프다. 수평이 안 맞다. 결국 장롱 다리 한 쪽을 박스를 접어서 괴어놨다.

페페루3.jpg 왜 저렇게 알록 달록일까? 이불대신 담요만 잔뜩 있는 도시.

애증의 매트리스는 드디어 비닐을 걷을수 있었다. 그동안 공사장에서 비닐채로 위에 커버를 씌운채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야 했었는데 그 비닐을 걷어내고 매트리스 커버를 씌울 수있었다. 원래 매트리스는 나무판자라도 대놓고 매트리스안에 공기가 통하도록 설치를 해야하는데 그런 받침대는 구매하지 않았다. 아직 완벽하게 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이곳에서 정착을 할지 말지 그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구매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다.


저때까지만 해도 우리 큰 딸은 (지금은 초6) 4살밖에 되지 않아서 낮잠을 꼭 자야하는 나이라 청소가 된 방에서 매트리스 위에 편하게 처음으로 잠을 잔 기억이 난다. 그동안은 낮잠도 늘 품안에서 세상 불편하게 잤었는데 이제는 누워서 편하게 잘 수 있는 공간이 생겨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동이었다.

페페루4.jpg 고산지대라 밥솥의 밥도 압력의 영향이 조금씩 있었다. 신기한 경험.

주방기구 또한, 하나하나 배치를 할 수 있었다. 진짜 집다운 집에서 주방다운 주방에 밥솥을 놓고 전기주전자, 그리고 각종 식재료들을 진열해둘 수 있어 너무 좋았던 것 같다. 저때의 기분은 그야말로 속이 시원했다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페페루5.jpg 가스렌지와 세탁기는 기본 옵션으로 들어가 있었다.

페루는 도시가스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LPG가스통을 주문해서 교체해가며 사용을 한다. 안전의 위험이 있긴 하지만 페루에서는 우리나라처럼 도시가스 배관 공사를 할 수가 없다. 일단 지리적으로 고산지대가 대부분이라서 어렵기도 하고 땅을 뚫고 배관을 연결해서 가스를 연결하기가 어렵다. 가스도 없을 뿐더러 이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사는게 익숙할 뿐이다.


다만, 도시로 내려가면 도시가스 대신 인덕션이라는게 있어서 인덕션과 가스통 두가지를 번갈아가며 사용을 하거나 내가 더 안전한걸 선택해서 사용을 한다. 생각해보면 난 리마로 내려갔을 때, 살았던 동네 두 곳에서 모두 가스통으로 연결된 가스렌지만 사용을 했다. 단점은, 미리 주문을 할 수 없어서 가스가 떨어져야 주문을 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페페루6.jpg 페루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와, 500원짜리 컵 그리고 15000원짜리 핸드폰

현지에서 사용해야할 핸드폰이 있어야 했어서 중고폰으로 (원화 15000원 정도) 구매를 했고 유심칩도 현지칩을 구매했다. 인터넷이나 전화통화가 느린건 뭐 덤으로 오는거라서 어쩔 수 없으니 이해를 해야한다. 저때는 2017년도라서 지금 2025년도에는 좀 더 빨라진 모습일거다. 우앙까요를 내가 다시 갈일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아무튼 어딘가 성장을 하고는 있겠지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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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친구가 챙겨준 캡사이신과 내가 샀던 고추장 된장들을 주방에 정리했다. 페루는 스페인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문화가 여전히 존재를 한다.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면서 중남미 국가들이 스페인어를 쓰게 되어 언어부터 문화 등 다양한것들이 스페인과 유럽의 문화가 남아있고 공존을 한다. 특히 식초같은 경우 스페인은 1리터짜리 한 병이 1000원을 안 한다. 페루도 마찬가지다.


특히 청포도, 적포도, 사과 등 다양한 과일들로 직접 짠 식초들이 다양하다. 식재료 또한 너무 저렴하다. 한국에 비하면 다양성도 상당하고 가격은 더 저렴하다. 감자만 해도 수십가지 종류가 있어서 그 중에 먹을 수 있는 것들만 추렸을때 10가지가 넘는 종류의 감자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정말 기회의 땅이고 마음껏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무대가 될 수 있는 곳이다.


이제 정상적인 집으로 이사도 했고 앞으로를 위해 하나하나 만들어가면 되는 상황만 남았다. 이제는 뭔가 편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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