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새로운 이름
나만 없어, 세례명
처음 성당에 가서 아이들을 주일학교에 등록하고, 첫 영성체반 부모들은 따로 교리를 들어야 해서 서로 통성명을 하고 신상을 적어내던 날의 일이다.
저는 김영희 마리아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철수 마르코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이름 뒤에 세례명을 붙여서 소개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내 이름 뒤에 세례명이 없어 조금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담 중이라 성당에 다니지 않던 남편도 세례명이 있는데! 부모교리반에서 나를 포함해 딱 두 사람만 세례명이 없었다.
“저는 예비신자반에 신청서를 제출하고 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인 홍OO입니다.”하고 나를 소개했다. 결혼을 할 때 혼인성사를 했고, 10여 년 간 아이들과 성당에 오고 싶었으며, 두 아이 모두 초등학생이라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해보려고 한다는 간략한 설명에 모두 환영의 박수를 쳐주셨다. 그 맘 때부터 우리 가족 중 세 명의 세례명을 정하기 위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빛을 닮은 성인, 루치아
초등학교 3학년인 첫째는 영어학원에서 쓸 닉네임을 지을 때 이미 고민을 많이 한 결과 Lucy로 지었기 때문에 세례명도 자연스럽게 '루치아(Lucia, Lucy)'로 정할 수 있었다. 당시에 쓰기 쉽고 짧으면서 미국사람들이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이름을 짓기 위해 여러 사이트를 검색해 보았다. 그 중 '내가 춘자라니'라는 사이트에서는 영어 이름을 입력했을 때 그 이름이 한국식으로는 어떤 느낌이 나는지 알려주었는데 많은 참고가 되었다.
Amy 이름을 가진 당신은 미국에서 은희입니다. 주로 1970-1980 년도에 유행했고, X세대에서 많이 사용된 이름이에요! 카세트테이프가 있던 낭만의 시절! Amy은(는) 미국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이름이에요.
Lucy 이름을 가진 당신은 미국에서 다현입니다. 주로 1990-2010 년도에 유행했고, 밀레니얼 세대에서 주로 사용하는 이름이에요! 80~90년대생이라면 이 이름이 완전 찰떡이라고 할 수 있죠! Lucy은(는) 2024년 아기 이름 TOP 100에 드는 이름이에요.
세례명을 짓기 위해 참고로 하는 사이트는 '모두의 세례명'인데, 자신의 생일과 성인의 축일을 참고로 하고 싶은 사람은 날짜별로 검색해 볼 수도 있고, 성인의 업적에 따라 원하는 스타일을 고를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좋았다.
치유의 기적, 레오
문제는 영어학원 닉네임을 Luca로 지은 둘째에게 있었다.
Luca 이름을 가진 당신은 미국에서 이안입니다. 주로 2000-2020 년도에 유행했고, 엄마들한테 인기가 많은 Z세대 이름이에요! 틱톡, 인스타그램 스토리 감성 그 자체! Luca은(는) 2024년 아기 이름 TOP 100에 드는 이름이에요.
누나와 세트 느낌으로 잘 지은 '요즘 스타일' 영어 이름이라서 좋아했는데, 세례명 중에 비슷한 것을 고르면 루카(St.Luke)이다. 하필 남편의 세례명이 루카여서 아들의 이름을 똑같이 지을 수가 없었다. 법적으로 절대 안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성당분들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때부터 다른 이름을 찾느라 골치가 아팠다.
루카복음도 귀에 익었고, 루카라는 이름이 쏙 마음에 들었던 둘째는 조금 실망하는 듯 했다. 그 토라진 마음을 돌리느라 저녁마다 휴대폰으로 '모두의 세례명'에 들어가 이 이름, 저 이름을 들이밀었다. '요한'이 좋다고 해서 그걸 할까도 했었는데, 그 이름은 남편이 - 너무 흔해서 별로라며 - 반대해서 결국 '레오'로 정하게 되었다.
지금 교황님이 '레오 14세'인 만큼 교황님 중에 아주 많은 이름이기도 한데, '모두의 세례명' 사이트에서도 레오라는 이름이 두 개 있었다. 동명이인일 경우 축일로 구분한다. 12월 13일이 축일인 '레오 1세'는 교황님 중에서도 대 교황이라는 호칭을 얻은 두 분 중 한 분이다. 보통 이 분의 이름을 많이 따서 짓는 것 같은데, 우리 집 막내는 축일이 4월 19일인 성인으로 정했다.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 그 날 이어서 인지 아들이 더 친숙하게 여기기도 했고, 뱀에 물렸다가 기적으로 치유되었다는 부분이 아이 마음에 더 신기하고 좋아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불꽃과 같은 사람, 헬레나
마지막으로 내 세례명.
내 이름을 내가 직접 새로 지을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면서, 한 번 지은 세례명은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묘한 책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글로 된 내 원래 이름 뒤에 붙였을 때 어감이 좋으면서도, 어떤 삶을 사신 성인이 좋을까, 내가 지향하는 천주교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고 여러 가지를 고려하느라 세례명 사이트를 몇 달 동안 들락거렸다.
대부분 성인이 되신 자매님들의 삶은 힘들고 슬프고 아프게 보였다. 그 숭고한 면면을 들여다보면 '대단하시다!'라는 생각은 들지만 내가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은 없었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성인은 '헬레나(St.Helen)'였다.
이미지부터 내 맘에 쏙 든 헬레나 성인에 대한 설명은 무척 길어 다 옮길 수 없지만 (궁금하시면 '모두의 세례명'을 참고해 주세요.) 키워드는 아래와 같다.
밀라노 칙령의 숨은 공로자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모자의 신앙이 맺은 열매 - 황제가 어머니를 모셔와 '고귀한 여인'이라 칭하고 동전에 얼굴을 새김
여러 성당의 설립자
십자가의 기적
순례자의 모범
불꽃과 같은 사람 - 헬레나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불꽃'을 의미하는 여성명사에서 유래
상대적으로 여성의 활동이 수동적으로 기록된 듯한 성경에서 아쉬움을 느끼곤 했는데, 이토록 스케일 크게 활약하신 여장부(?)가... 아니, 황태후(황제의 어머니)가 계셨다니 무척 놀랍고 매력적이었다. 내면의 꺼지지 않는 불꽃과도 같은 신앙이라니! 내가 추구하는 바에 가깝게 느껴져서 내 세례명은 이것으로 정했다.
한 번 짓는 세례명, 신중하게
세례명이란 세례를 받을 때 세속의 이름과 달리 따로 받게 되는 영적인 이름이다. 보통 성인의 축일을 보고 자신의 생일과 비슷한 분 중에서 고르는 이유는 축일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흔한 이름이 싫다고 길고 어려운 것으로 정하면 부르기도 어렵고 어감이 좋지 않아 성당에서는 별로 권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왕 짓는 나의 두 번째 이름이니, 부르기 좋고 발음하기 쉬우면서 내 이름이나 성향과 어울리는 것으로 신중하게 알아보고 붙이는 것이 좋겠다. 우리 가족은 루카, 헬레나, 루치아, 레오 이렇게 네 명의 개성이 담긴 세례명을 지었지만 신자가 되기 전에 가족관계 등을 고려하여 성경 안에서 서로 연관 있는 인물들로 짓는 것도 좋은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