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그 어느 날의 단상

by 가릉빈가

비가 옵니다. 집을 나서며 우중충한 하늘에 내심 불안한 마음에도 지각을 할까 봐 집에 돌아가지 않고 나왔더니 결국 비가 옵니다.


점심 약속을 사외로 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지하매장으로 내려가서 우산을 샀습니다. 아찔하게 눈에 박히는 어마무시한 핫핑크의 3단 우산. 과연 내가 이것을 쓸 수 있을까? 고심하면서 샀습니다. 혹 그 색만 있었냐고 묻고 싶나요? 아니요. 노랑색, 연두색, 남색, 보라색 세상에 있는 모든 색의 우산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친히 고른 겁니다. 스스로 골라놓고 약한 소리를 하는 거지요. 아마 오늘부터 당당하게 잘만 쓰고 다닐 겁니다.


바로 사무실로 올라가기에는 하도 쓸쓸하여 비 오는 모습이라도 볼까 싶어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바람에 비가 부서지고 있어 결국 나가봤자 회사 1층 로비의 대형 회전문 옆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입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을 던지며 제 옆을 스쳐 갑니다.


비바람이 쌀쌀하게 쟈켓 끝을 건드리는 거 보니 이제 가을 같지 않던 가을은 한가위로 종지부를 찍고, 완연한 모습으로 다가오려나 봅니다.


한가위 동안 단 15분의 외출을 했습니다. 논문 마감이 이번 주거든요. 다행히도 미리 친척이 다녀갔고, 이번 명절에 만나지 못하는 친척들은 직접 찾아뵙기로 하여 온전히 조용한 한가위를 보낼 수 있는 덕에 논문 쓸 수 있었습니다. 이전처럼 명절에 친척들이 찾아왔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일이겠지요.


논문에 치여서 사느라 주변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몰랐습니다. 논문 쓸 땐 옆에 사람이 죽어도 모를 만큼 강퍅하게 삽니다. 심적 여유도 전혀 없으니 회사의 부속품을 살지 않겠다며 오전, 오후 20분씩 탑돌이를 하겠다는 그 알량한 다짐 따위 접어 던진 지 오랩니다. 논문 앞에선 그 무엇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나마 어제 논문을 다 쓰고, 오늘은 검토만 남겨두고 있어 이렇게 바깥 풍경 한 번 볼 수 있는 겁니다.


서울 중심 한복판이라 공기가 좋을 일은 절대 없지만, 그래도 사무실에 내내 처박혀 있는 것보단 낫습니다. 어느새 가로수라 말하기도 미안한 앙상한 가로수에 주황물이 내려앉았습니다. 매일 스치고 지나가는 자리거늘 눈치챈 건 비로소 오늘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번 달 점심시간에 잠시 교수님 뵈러 학교 갔을 때, 학교 둘러싼 산나무들이 벌써 붉어진 것을 보고 가을이구나, 읊조렸는데 위도(緯度) 차이 얼마나 난다고 이 쪽은 한 달이나 늦습니다.


내가 눈치를 채든 안 채든 주변은 변하지 않는 듯하며 나름의 발군으로 변해갑니다. 그게 변화인지 변질인지는 각자의 몫이겠죠. 비바람 손끝 아리게 다가오니 여름만 해도 저 끝 언저리에 있던 겨울이 바로 옆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올 겨울은 또 얼마나 나에게 고통을 주고 지나갈런지요. 하지만 곧 벚꽃님네 나빌거릴거니 그 또한 얼굴 한 번 찡그리고 지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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