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우리가 '지문'을 남겨야 할지도
이제 우리가 '지문'을 남겨야 할지도
- [신의 지문], 그레이엄 핸콕, 1995.
"마지막으로 기자에서 멀리 떨어진 '남극 대륙'의 빙원 아래에 있는 지형에 대해서 엄밀한 조사를 하면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라진 문명의 완전한 유적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남극 대륙'이기 때문이다."
- [신의 지문], <8-52. 밤의 도둑처럼>, 그레이엄 핸콕, 1995.
지도 한 장으로부터 기묘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16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해군 제독이었던 피리 레이스가 제작한 지도에는 남극 대륙이 있다. 남극 대륙이 발견된 게 19세기인 1818년인데도 16세기 지도에 등장한 것인데, 아마도 피리 레이스는 남극에 가보지는 못했을 터, 오래전부터 전승된 지도를 베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가 기묘한 이유는 지도의 남극 대륙이 지금처럼 빙하에 뒤덮힌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1만3천년 전 플라이스토세 말기에는 온 지구가 빙하기였다는데 남극 대륙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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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묘한 이야기는 16세기 의문스러운 지도 한 장을 매개로 하여 '남극 대륙'에서 출발하여 다시 '남극 대륙'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대홍수' 신화 속에 기묘하지만 확실히 지성을 가진 인도하는 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피부색이 하얗고 수염을 기른 사람이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오시리스는 이 보편적인 사람의 이집트판이다. 오시리스가 마지막으로 행한 것 가운데 하나가 나일강 유역에 사는 원시적인 사람들의 식인 풍습을 없앤 것이었다. 중앙아메리카의 비라코차는 '대홍수'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명을 전파하는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케찰코아틀은 제4태양이 파괴적인 '대홍수'에 의해서 사라진 후에 멕시코에서 옥수수를 발견하고 곡물을 전했으며 수학과 천문학과 세련된 문화를 전달했다.
이 신화들은 마지막 빙하시대에 살아남은 구석기의 부족들과 동시대를 빠져나온 정체를 알 수 없는 높은 지성을 가진 문명인과의 우연한 만남을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 [신의 지문], <5-32.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게 하는 말>, 그레이엄 핸콕, 1995.
20세기말 잠시 유행했던 책의 이야기다.
영국의 기자 그레이엄 핸콕(Graham Hancock)은 '사라진 문명'을 찾아 전 세계를 다닌 기록을 [신의 지문](1995)이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세기말 당시야 종말론이 유행했지만 당시의 내게는 흥미거리도 되지 않았다. 신이든 신의 심판으로서 종말론이든 죄다 과학적이지 못한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던 내게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은 어릴적 우연히 읽었던 U.F.O나 '7대 불가사의' 따위를 다룬 찌라시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잊혀졌던 [신의 지문]은 21세기에 어느덧 중년에 들어선 나의 눈에 들어왔다. 중국의 역사가 리숴(李碩)가 [전상(翦商)](2022)이라는 책에서 기원전 2세기 전 고대 중국의 은나라까지 횡행했던 '인신공양제' 이야기를 다뤘고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는 이 잔혹한 문명을 인문주의적 풍습으로 대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읽고 있던 터라, 고대 잉카나 마야 문명의 '인신공양제'가 궁금하기도 했던 거다.
결론적으로,
20세기 청년이었던 나는 [신의 지문]을 무시했지만,
21세기 중년이 된 나는 [신의 지문]이라는 음모론이 흥미롭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이 들면 다시 어려진다는 말처럼.
그레이엄 핸콕은 페루 잉카 문명의 나스카의 거대한 지상 그림을 하늘에서 내려보며 거미 형상의 몸통 세 개 점에서 오리온 별자리를 보기도 하고 원숭이 그림에서 동심원 꼬리와 같은 거대 문양의 정밀성을 통해 다시금 아주 오래전 지적인 문명의 흔적을 본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 '신'이나 '외계인' 등으로 쉽게 그 근원을 돌리지 않는다. 이 지점이 내가 오래전 비과학적인 관념론으로 보았던 [신의 지문]을 새로운 유물론의 시각으로 본 지점인데 '지문'을 남긴 주체는 오래전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문명이며 그 배경은 빙하기와 대홍수 재난을 동반한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레이엄 핸콕이 찾은 사라진 고대 문명의 일차적 증거는 남아메리카 잉카 문명의 신화속에 등장하는 '비라코차'의 등장이다. 원주민과 달리 하얀 얼굴에 긴 턱수염과 롱코트를 입고 바다로부터 와서 잉카 문명에 신문명을 전하고 다시 바다로 떠났다는 이 구세주와 같은 존재는 흡사 우리에게 익숙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도 겹친다. 원주민과 다른 외래종족으로서 '비라코차'는 중앙아메리카 마추픽추와 같은 마야 문명으로 가면 '케찰코아틀'이라는 신화적 존재로 다시 나타난다. 마야 문명의 인신공양제는 역시 하얀 얼굴에 긴 턱수염을 한 '케찰코아틀'로 인해 폐지되었는데 신석기 시대였던 당시에 옥수수 재배 등 신문명을 전했던 '케찰코아틀'이 '테스카틸포카'라는 내부 반란자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아즈텍 문명에서는 또 다시 인신공양제와 같은 잔인한 문명이 부활했다고 한다. 여기서 '케찰코아틀'은 다시금 '구세주' 또는 '메시아'로 현상하는데, 아즈텍인들은 그가 다시 재림하여 잔혹한 현실을 뒤바꿔줄 거라 믿었다고 한다.
남아메리카 잉카 문명의 '비라코차'와 중앙아메리카 마야 문명의 '케찰코아틀'은 대서양 건너 이집트로 가면 '오시리스' 신화로 반복된다. 고대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 농업 기술과 정밀한 건축술 등의 문명을 심어주고 역시 '인신공양제'를 없앤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 또한 의형제 세트와 72인의 반란으로 죽음을 맞았지만 신화속에서 다시 부활한다.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의 압권은 고대 이집트 기자 지구의 대피라미드군과 스핑크스다. 기원전 2,5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진 기자 지구 대피라미드와 중소형 피라미드 2기, 그리고 스핑크스는 핸콕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5천년 전이 아닌 1만년 전에 지어졌다는데, 이 피라미드는 다른 곳의 무너진 조악한 피라미드 무덤과 달리 인류 문명 이전의 지적인 고대 문명의 흔적('지문')이라는 주장이다. 즉, 기자 지구 대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이 아니라 오래전 사라진 지적 문명이 빙하기였던 1만년 이후 다시금 시작될 미지의 문명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은 일종의 수수께끼 '기계'라는 말이다. 피라미드 3기는 오리온 성좌와 일치하며 피라미드 크기 및 각도와 통로 경사각 등의 비율은 천재적인 수학적 원리로 이루어진 바, 빙하기 말기의 '대홍수'라는 전 세계 공통의 재난 이후 다시금 시작될 후세 문명에게 지구 문명의 멸망과 부활의 주기로 약 1만3천년의 시간을 수학적으로, 천문학적으로 남긴 일종의 '지문'이라고 한다. 하늘의 춘분점과 추분점의 정동 방향을 바라보는 스핑크스 또한 1만년 전 빙하기 이전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스핑크스 몸에 새겨진 침식 흔적이 사막의 모래로 인한 게 아닌 물에 의한 그것이라는 건데, 이집트 기자 지구가 사막이 아니었던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대홍수'의 흔적이기도 하다.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들과 스핑크스는 사라진 고대문명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남긴 '지문'이다.
이 책의 제목 [신의 지문]은 원제로 보면 [Fingerprints of the Gods]로 '일자(The One)'로서의 '신(The God)'이 아닌 다수의 '신들(Gods)'이다. 하느님이나 외계인이 아닌 지구상의 오래전 다른 문명에서 온 신문명의 전파자들로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나 남아메리카 잉카의 '비라코차'와 중앙아메리카 마야의 '케찰코아틀'이 그들로 추정된다. 이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황하 문명의 삼황인 수인, 신농, 복희 및 주나라 시조 후직 등 농업 문명을 전파한 자들도 1만년 전 이야기라면 역시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 나는 그 문명이 '해양 문명'으로 항해자들의 국가였음이 틀림없다고 추측하기 시작했다. 이 가설을 지지해 주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경이로운 고대의 세계지도, 이집트의 '피라미드의 배', 마야의 놀라운 역법체계에서 볼 수 있는 천문학적 지식, 케찰코아틀과 비라코차처럼 바다를 항해하는 신의 전설 등이 그 예이다.
... 이 건축가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특징적인 '지문'을 세계 각지에 남겨놓은 듯 하다."
- [신의 지문], <8-50. 헛수고를 한 것이 아니다>, 그레이엄 핸콕, 1995.
기묘한 남극 지도로 시작하여 아메리카와 이집트 문명을 돌아본 그레이엄 핸콕이 [신의 지문]의 거대한 문명 퍼즐 조각을 미쳐 다 맞추지 못하고 좌절하던 순간, '도서관의 천사'가 나타난다. 일을 그만두게 된 핸콕의 조수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말한 것처럼 사라진 고대 문명이 3천 킬로미터 이상의 넓은 대지와 높은 산맥들, 그리고 바다와 물 등의 자연조건이 없으면 안된다는 주장에 더불어서 핸콕은 우연히 어느 학자 부부의 '남극 대륙'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자 지구의 수수께끼 문명 기계인 피라미드와 잉카 문명 나스카 거대문양, 마야 문명의 마추픽추 건축물 등은 지구의 '세차 운동'과 그로 인한 빙하기 기후변화 주기를 암시하고 있는데, 1만년 이전의 남극 대륙은 지구의 끊임없는 지각변동으로 인해 동토의 땅이 아닌 온화한 지역으로 다른 대륙의 빙하기 땅과 달리 지금의 인류와 같은 선진 문명을 구가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결론이다.
그레이엄 핸콕이 [신의 지문]에서 찾아다닌 증거들은 이 가설을 증명하는 퍼즐 조각이었던 것이다.
1950년대 노벨화학상 수상자 파울 크뤼천의 '인류세' 또는 21세기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 사이토 고헤이의 '자본세'라고도 불리는 1만년 간의 현재의 '홀로세'는 인류의 문명 개발로 인해 기후위기가 재촉되고 있으나 한편으로 '신들의 지문'에 의하면 결국 1만3천년의 주기로 빙하기나 대홍수, 대행성 충돌 등과 함께 멸망할지도 모른다. '공룡 대멸종' 이후 인류 문명 전체가 붕괴되는 이른바 46억년 지구 역사상 '여섯번째 대학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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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비롯한 수많은 문명이 지구적 기후변동으로인해 몰락했다는 학설도 있는데, 이런 '소빙기'들을 넘어 1만3천년의 주기로 전 지구적 '대빙하기'와 빙하기 말의 '대홍수'들은 공룡시대든 인류문명이든 한 시대 일체를 쓸어버렸고 또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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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앞으로 올 미지의 문명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지문'을 남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출발점이 다시 남극이든 화성이든 다른 그 어디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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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의 지문 - 사라진 문명을 찾아서(Fingerprints of the Gods - The Evidence of Earth's Lost Civilization)](1995), Graham Hancock, 이경덕 옮김, <까치>, 1996.
2. [전상(翦商)](2022), 리숴(李碩), 홍상훈 옮김, <글항아리>, 2024.
3. [기후의 힘], 박정재, <바다출판사>, 2021.
4.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2020),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5. [로마의 운명](2017), 카일 하퍼, 부희령 옮김, <더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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