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 한 바다

내가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9-펫로스,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by 포도나무
여행은 때로 그 어떤 치료보다 강력하다.
바빠서, 힘들어서, 여유가 없어서 모른 척해왔던 마음의 소리를 마주하게 해 준다
_김민지, <반짝이지 않아도 잘 지냅니다>

나아지면 같이 꼭 바다에 가자고 이쁜이와 약속했었다. 함께 지냈던 8년 동안 산으로, 들로, 계곡으로, 황톳길도 함께 다녔지만 바다는 아직 가보지 않았었기에. 어쩌면 그 '버킷리스트'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좀 더 오래 같이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 살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같이 '지켜내고 싶은' 약속을 위해, 작은 사진이 담긴 아크릴 액자와 함께 강릉 바닷가에 도착했다. 해변에서 가족, 친구와 까르르 웃으며 즐거움을 만끽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곳에 함께 왔다면 탁 트인 수평선과 짭짤한 바다내음에 처음에는 낯설어하고, 밀려오는 파도에 놀라 뒷걸음질 치면서도 언제나처럼 조심스럽게 당당한 걸음으로 축축한 백사장 모래 위에 작은 발도장을 콩콩 남기며 몹시 좋아했을 작고 소중한 나의 강아지를 떠올렸다.


나: , 바다에 오니 참 좋다. 이제야 왔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오는 동안 길이 막혀서 생각보다 오래 걸렸는데 길 위에서 쌓인 피로도 싹 풀린 느낌이야.

너: 여기 해변 근처에 강아지와 함께 묵을 수 있는 펜션도 두 군데나 있더라. 이쁜이랑 같이 와서 바다 구경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 그래서 더 아쉬워. 이 좋은 풍경을 못 보여준 게. 같이 바닷물에 발 담가본 추억이 없는 것이.

너: 계곡에 가 본 추억은 있는데, 그렇지?

나: 여름인데도 서늘했던 계곡물의 청량하고 얼음골처럼 시원했던 느낌이 아직도 피부에 닿는 것 같아. 처음으로 이쁜이를 데리고 계곡에 놀러 갔을 때 채 30센티미터도 안 되는 돌과 돌사이를 한참 망설이다가 점프(짬푸!)해서 고작 한 뼘 앞 유리알 같이 맑은 물에 앞발을 텀벙 담가버리던 모습이 생각나.


너: 여기 같이 왔다면 발가락 사이사이로 알알이 올라오는 모래를 밟으며 녀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 아마 처음엔 어색해했겠지만 곧 아랑곳 않고 총총걸음으로 앞으로 나갔을 거야. 날갯짓하듯이 푸르르 푸드덕거리면서~

너: 깜장콩 같은 젤리 발바닥에 콩고물처럼 묻은 모래를 톡톡 털어내면서 말이지.

나: 그리고 숙소에 돌아오고 나서는 발가락 사이사이 소금기를 닦아주느라 또 한바탕 했겠지.

너: 그러면 그것도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을 테고.


나: 있을 때 잘하지라는 말 있잖아. 요즘 제일 아쉬운 게 그건데. 산책을 하던 순간순간을 좀 더 즐겁게 보냈으면 어땠을까, 의무가 아니라 매 순간 추억 쌓기처럼 보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너: 그랬으면 헤어진 후에도 떠올릴 추억이 더 많았을 텐데 싶기도 하지? 근데 원래 없으면 아쉽고 못해보면 계속 곱씹는 게 사람 마음이긴 해. 후회에 빠진 건 아냐. 자연스러운 거야.

나: 맘껏 슬퍼해도 된다면서 갑자기 걱정되는 거야?

너: 걱정은 아니고, 애도의 기간 중에 슬픔, 걱정, 못 이룬 바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 다가올 때 너무 부여잡거나 파묻힐 필요는 없다는 거야. 파도처럼, 밀려오다가도 다시 멀어질 테니까

어떨 땐 갑자기 훅 들어와서 무릎 위까지 올린 옷도 적셔버릴 기세지만 어떨 때는 발끝만 간지럽히고 마는 물결처럼.

나: 그렇구나... 그럼 파도를 타볼게. 내가 파워 J인데 파도의 P를 배워볼게. 내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마음에 적절히 반응하는 걸, 친절하게 응답하는 걸 연습해 볼게.


8년 전, 겨울이 시작되던 11월의 어느 날에 자의든 타의든 어떤 이유론가 밖에 나왔다가 집을 잃었던 기억 때문인지 이쁜이는 산책하러 나가자고 하면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노래처럼 얼음이 되곤 했지만, 돌아보니 녀석은 자연에 나오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아마도 향긋한 풀내음, 막힌 천장 없이 뻥 뚫린 하늘, 온갖 나무며 꽃이며 새로이 후각으로 만나는 세상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는 즐거움이 가득했기 때문이리라.


쫄보라고 놀렸지만 가족을 지키는 데는 용감하고 수개월에 걸친 병원 처치를 받는 동안 이번에는 어떤 것을 해 줄 수 있을까, 너의 작은 몸이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순간순간마다 용맹한 눈빛으로 우리 모두에게 다시 앞으로 나갈 힘을 주던 내 작은 가족.

네가 그렇게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상황들 속에서도 충만하게 살았듯이 나도 그렇게 파도타기를 해볼게.

네가 옆에 없는 이 삶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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