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강아지가 다 예뻐 보여

내가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8-펫로스,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by 포도나무
창옥이, 가을 보여?
_김창옥, <당신은 아무 일 없던 사람보다 강합니다>-p210

이쁜이 없이 다시 맞이한 가을, 모처럼의 휴일을 맞아 서울숲으로 갔다. 바람은 살짝 찬듯하지만 아직 여름의 끝자락을 밟고 있는 듯 푸릇한 잔디와 빼곡한 이파리들 사이로 들이치는 볕이, 그리고 때때로 후두두 내리는 빗방울이 후덥지근한데 어느새 나무 아래에는 도토리들이 수북이 떨어져 있고, 숲 여기저기에 가을은 새로운 옷을 입혀가고 있었다.


길을 걷다 도토리를 발견하신 엄마는 '우와, 여기도 있다, 저기도 있다' 하시면서 어린아이들이 보물찾기 하듯이 도토리를 주워 올리셨다. 갓까지 달린 채로 떨어진 '통짜 도토리'는 오랜만에 본다며 모처럼 신나 하시는 모습이, 일정 탓에 얼른 식물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계획이었던 나를 조바심 나게 하면서도 잔디 사이에 숨겨진 발견과 알알이 도토리를 주워들 때의 성취감을 만끽하시는 모습에 그저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대한 즐거운 느낌을 함께 가져본 것이 오랜만인 것 같아서였다.


너: 간만의 숲 산책이네, 가족과 함께 하는... 애써 시간 내서 갔는데... 힐링 좀 된 거야?


나: 힐링되다 뿐이야~눈 호강도 했지~

날이 좋아서인지 숲길을 각양각색의 강아지들이 보호자들과 함께 산책을 만끽하고 있었거든. 보송보송한 털과 꼬리를 한껏 살랑이는 포메라니안도 보이고, 들녘 황금 곡식 물결처럼 멋진 연갈색 털을 가진 진돗개도, 꼬불꼬불하고 방방한 하이바가 귀여운 비숑이랑...

식물원 쪽으로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저 멀리서 위풍당당하게 리드줄에 세 마리 강아지가 함께 도레미~덩치 순으로 한꺼번에 다가오는 거 있지. 그중 한 마리 까만색 푸들은 뒷다리로 번쩍 일어나서 걸음을 멈추고 보고 계시던 엄마 무릎으로 기어올랐지 뭐야! 붙임성이 참 좋은 녀석이구나~생각해서 고마웠고 몇 달 만에 실제로 보는 귀여운 작은 친구의 재롱에 엄마는 함박웃음을 지으셨지... 기분이 좋으면서도 짠한 순간.


이쁜이가 떠나고 나서 엄마는 종종 말씀하셨어

"이제는 세상 모든 강아지가 다 이뻐 보인다. 이쁜이 살아있을 때는 우리 댕댕이가 더 이쁘다고 비교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잘생기고 못나고 가 없어. 다 이뻐 보여"


너: 그렇게 이뻐? 세상 모든 개가.


나: 진짜 나도 그래. 아침에 출근길에, 점심 먹고 짬 내서 한 바퀴 돌 때, 다소 지친 퇴근길에 만나는 강아지들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서서 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너: 그냥 강아지라서 좋은 거야? 너는 이제 없는데 남들은 있는 강아지라서 서글프지는 않고?


나: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헤헥~거리면서 내민 분홍혀, 살랑살랑 버들강아지처럼, 아니 때로는 풍차처럼 흔들리는 꼬리, 킁킁거리면서 풀냄새를 맡는 깜장콩 같은 코와 조심스럽게 기울여 들이대는 이마, 흑요석처럼 빛나는 까만 눈동자. 생명으로 가득 찬 귀여움 꾸러미들이지~어쩌다 눈이 딱 마주쳤을 때의 그 표정, 잊지 못할 교감의 순간. 민망함, 행복함, 쫄보내음, 긴장감~여과 없이 느껴지는 감정들의 순진함에 마음이 사르르 녹으면서 무장해제 될 것 같다니까.

너: 즐거워 보이네. 강아지들 이야기하는 게 신나 보이고. 좀 회복된 건가, 이제는?


나: 그래, 신나. 이제는 신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마음에 그리움과 여전히 함께하는 슬픔이 있지만. 얼마 전에 김창옥 TV를 봤는데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특히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에게, 그리움을 끝까지 잘 간직하고 아이를 기억하려면 부모님의 삶도 건강하게 탄탄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세상을 떠난 아이가 원하는 것이 부모님이 계속 힘들어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하는 말이 마음에 남았지.


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스럽긴 한데.. 이런 말조심스럽지만, 좀 괜찮아지는 듯했다가도 다시 힘들어질 수 있어. 전문용어로 '퇴행'이라고 하는데. 그럴 때 애써 극복해 왔는데 뒤로 물러나는 것 같아서 너무 실망하지 말았으면 해.


나: 음.. 괜찮을 것 같아.. 이제는 슬픔과 함께 걸어가는 법을 연습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살아간다는 게 꼭 앞으로만 계속 전진해야하는 건 아니잖아. 김창옥 교수님 강연을 통해서 들은 것처럼... 내가, 내 삶이 슬픔에 타버리게 소진하는 대신, 애도와 슬픔을 내 삶에 그리움으로 함께 가져가도록. 그리고 이 순간에 부드러운 산들바람처럼 다가오는 밝은 기분들에도 고마워하고 소중히 여기고 싶어. 이쁜이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던 세상을 내가 지금 살고 있으니까 말이야.


네가 없는 세상인데 나는 웃어도 되는 것인지 무척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더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더 잘 돌봐주지 못해서, 더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더 많이 못 놀아줘서, 더 맛있는 것을 먹여주지 못해서... 못해 준 것들이 어쩌면 너를 데려간 이유로 이렇게 저렇게 작용해 버린 것 같아서... 울렁이며 다가오는 아쉬움과 미련, 죄책감의 그늘에 피할 바를 모르고 힘들어하는 시간들이 여전히 있곤 하다. 그래도 조금씩 잿더미 속에서도 새싹이 피어나듯이, 화마가 훑고 가서 황폐해진 산과 들에 봄의 새싹이 피어나듯이 때로는 웃을 수 있는 시간들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세상이, 세상의 모든 강아지들이,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예쁘게 '보이는 시간'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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