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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율 Nov 21. 2023

김장하고 싶은 남자


"절임배추 20킬로 주문했어"



 시댁, 친정 모두 김장을 하지 않는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해도 김장이 연례행사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는 명절 못지않은 큰 집안 행사임을 안다. 시어머님은 우리가 결혼한 지 5년 정도까진 친정(큰 오빠네)에 모여 김장을 하셨고, 바로 택배로 40킬로 분량을 보내주시곤 하셨다. 그 후론 어머님도 시댁의 큰 행사를 치러내야 하는 어머님의 새 언니를 배려해서 안 가기로 정하셨단다.

아이들이 어리다는 걸 무기 삼은건 아니었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신 어머님은 주변에 맛있는 김치를 수소문하시며 좋은 취지로 만드는 복지관 김치, 전통 시장 안에서 파는 김치 등등을 여태껏 보내주신다. 이런 모습들이 김장으로 스트레스받는 내 주변 며느리들에게 부러움을 살만한 일인지 싶지만 김장에 대해 큰 스트레스가 없는 건 사실이다. 아니 그랬었다.

시어머님도 별말씀 없으신데 남편이 김장을 하자고 한다.






 아이들 어린이집, 유치원 다니던 시절, 이맘때면 깍두기든, 배추김치든 김장체험이라는 이름 아래 김장매트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두건과 앞치마를 장착하고 조물조물 버무려 가져 온 김치 맛을 본 적이 한번쯤은 있을 거다. 김장이란 걸 해본 적이 없는 남편은 다들 한다는 김장이 궁금한 건지 아니면 우리만의 전통을 만들고 싶은 건지 어쨌든간 호기심 가득 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가 김장을 해서 부모님께 조금씩 보내드리면 어때?

내가 재료 손질하고 버무릴테니까 보조만 해줘"

"보.조 라고 했지? 그럼 한번 해보자"


좋은 뜻이긴 하니 크게 반박하진 않았다. 희한하게도 막상 "절임배추 20킬로 주문했어"라는 남편 말에 뭔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졌다. 단순히 겉절이 하는 수준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 우리 집의 가풍을 빚어낸다는 기분이 들더니 이것은 이내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그 부담감을 알쏘냐 대문자 J 계획형 남편의 의지대로 시간은 흘러간다.


엑셀에 절임배추 20킬로에 필요한 부재료들, 풀 쑤는데 필요한 재료들, 그 밖에 도구들까지 쫘르르 정리해서 보여주는 남편. 000의 유튜브까지 봐보라면서 똑같이 해보자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점점 더 나를 옥좨오는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감정은 감정이고, 이미 절임배추는 도착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집 근처 로컬푸드에 가서 갓이며 열무, 파 등등 김장에 필요하다는 재료목록대로 엑셀표를 봐가며 수량을 체크했다. 애들 김장체험 할 때 봤던 동그란 김장매트도 주문하고 큰 채반과 아이 두 명은 통목욕이 가능 할 정도의 스텐대야까지 속속들이 도착했다.

하나 둘 거실 한 켠에 자리 잡은 준비물들을 보니 더욱 더 부담스러워졌

몇 번이고 내가 느끼는 이 부담스러운 감정의 뿌리가 무언지 고 싶었다.


'그깟 배추에 양념 버무리면 간단한걸 왜 그리 어렵게 생각해?'

'망치면 어떡하지? 한 번이 쉽지 매년 이렇게 하는 건? 글쎄..'


(내게만) 결전의 날.

'고춧가루는 맵지 않을지? 정말 레시피대로의 비율대로 하면 맛이 나오는 건지?'

평소 요리에 두려움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감정이 일반적이진 않다.

4인 가족의 찌개를 끓이고 제육볶음을 하는 게 아니다 보니 맛과 양 조절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남편은 이런  마음을 알 리 없지.

"레시피대로 1. 재료손질하고 2. 풀 만들고 3. 버무리면 되는 거 아니야?"

'이런.. 이 사람 너무 쉽게 생각하네. 아니 반대로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혼돈의 카오스구나' 

아마 망쳤다면 빠른 포기를 했을지도 를텐데 첫 김장치고 너무 맛이 있어버렸다. 공식 코스대로 돼지고기를 삶고 생굴까지 더해서 언제 그랬냐는듯 노동 후에 오는 기쁨을 만끽했다.


적은 양이긴 했지만 처음 얘기한대로 양가에 택배로 보내드기도 했다.

"고생했네 너무 맛있다. 잘 먹을게"라는 시부모님 반응과는 달리,

성공적인 첫 김장이후 다음 해까지 총 두 번의 김장김치를 받은 친정엄마는 당신이 이렇게 *썽썽한데 딸한테 김치 받아먹는 게 썩 기분이 좋지않다셨다.


엄마의 반응에 내가 지금까지 느꼈던 부담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김장의 무게를 엄마는 아시는 거다. 정확히는 가족들의 일 년을 든든히 책임질 깜이 되기엔 나는 아직 부족함이 많다.

우리만의 김장 시작을 알리는 남편의 한마디가 좋은 뜻에서의 나눔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다. 또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본인이 다 하겠다며 팔 걷어 부치는 배려도 고다.


그저

어느 누가 시키지도, 말하지도 않았지만 책임감을 부여하고 무게를 얹고 있었던 건 나 자신이었다.





"앞으로 엄마가 보내줄 테니까 김장하지 마"

그 후로 우리끼리의 김장은 끝이 났고, 우리 엄마는 김장김치 예약시즌이 되면 선 예약 후 통보하신다.

엄마는 사랑이다.






*썽썽한데 : 멀쩡하다, 혹은 쓸만하다의 전라도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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