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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작가 Oct 26. 2020

글쓰기, 치유가 되려면

2003년 미국 생물에너지 대안 연구소에서 DNA  조각들을 이어 붙여 세균을 잡아먹는 바이러스를 만들었다. 연구 시작 14일 만이었다. 2008년에는 한국 과학자들이 암세포 치료 목적의 킬러 바이러스를 제조했고, 2013년에는 중국 과학자들이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H5N1과 신종플루 바이러스 H1N1을 합성한 새로운 독감 바이러스 변종을 만들기도 했다.(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바이러스 변이에 대비한 연구였다고 한다.) 질병의 치료 또는 예방. 새로운 치료제 개발로 인한 희망, 혹은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 탄생으로 인한 공포. 만든 방법은 같아도 결과물은 이렇게나 다르다.  




내면과 과거를 파헤치며 글을 쓰다 보니 묵힌 감정이 터져 나왔다. 무작정 마구 쏟아내던 글이 여러 편 쌓일 때쯤 되자, 글로 표현된 나의 에피소드와 감정은 가끔 조사마저 똑같았다. 쌍둥이 같은 글들을 쏟아내고 쏟아냈지만 매번 씁쓸하고 우울했다. 똑같은 말, 똑같은 글, 똑같은 생각.


"그래서, 어쩌라고?"


종국에는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졌다. 쓰기 싫어졌다. 시간과 공을 들여 쳇바퀴만 돌고 있으니 지겨울 만도 했다. 내 감정을 수용하고 인정했다. 허구한 날 반복되던 생각과 글 끝에 물음표를 남기고 나름의 답도 찾았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어두컴컴 우울한 나의 과거는 변함이 없었다. 마음과 상처가 치유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내 글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답답했다. 누군가에게 말이라도 속시원히 하고 싶은데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고민상담을 들어줄 사람을 찾고 싶었다. 동시에, 내키지 않았다. 글을 써도 변하지 않은 내 삶의 기운이 몇 마디 수다로 끌어올려질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글에 지겹도록 쏟아냈는데 말로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필요한 건 하소연처럼 임시방편 대나무 숲이 아니라 진짜 해결책이었다.


문득, 글과 말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심각하고 부정적인 분위기가 풀풀 풍기는 내 글처럼, 내가 지금껏 해온 말도 똑같았다. 약자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입만 열면 그랬다. 하소연이 나왔고 한숨이 거들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고생했다고, 고생한다고 말했고 나는 힘없이 웃어 보이는 일이 반복되었다. 분명 대화의 시작은 그게 아니었는데, 끝나고 보면 나처럼 불쌍한 사람은 또 없을 지경이 되어 있곤 했다.

처음에는 그저 힘들고 외로운데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글쓰기를 통해 내 과거와 감정을 한참 쏟아냈는데도 여전히 남과의 대화 속에서 나는 웅크린 피해자였다.


'나 진짜 그렇게 힘든 상황인 건가? 견딜 만 한데? 그렇게까지 고생스럽거나 최악인 상황은 아닌데? 그런데  왜 자꾸 부정적인 방향으로 날 드러내는 걸까? 감정을 생각으로 억누르고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감정을 인정하고 수용해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까?'


끈질기게 고민한 끝에 마침내 방법을 찾았다. 결심했다. 나의 과거와 경험의 모든 순간에 의미를 찾아주기로.


나의 지난 글들을 모두 찾아 읽었다. 그리고 그 글에 기록된 모든 일에 대해 '이 일이 나에게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찾기 시작했다. 꽤나 노력해야 했다. 어떨 때는 글로 쏟아내느라 걸린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기도 했다. 사관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 중간에 박차고 나올 수도 없었던 이유, 소속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스스로를 몰아세웠던 순간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며 감정의 바닥을 치던 때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시간이 남긴 의미를, 그것도 긍정적인 의미를 찾는다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진심으로 치유받고 성장하고 싶었다.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여러 번 파헤치고 고쳐 썼다. 하나의 사건, 그때 내가 했던 생각과 느낀 감정, 그 이유를 적나라하고 상세하게 기록한 글에 그 일이 가져온 긍정적 의미까지 더해졌다. 간혹 정신승리에 가까운 의미 찾기 작업 끝에 비로소 가벼워졌다. 수없이 많은 글을 쏟아냈는데도 과거에 갇혀있던 나는, 그 글마다 의미를 연결하고 나서야 과거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끝없는 하소연 말고 '그래도 이건 좋은 점!'라고 덧붙일 수 있게 되었다. 분명 '글'이라는 도구는 같은데, 결과물은 전혀 달랐다. 마치 암세포 킬러 바이러스와 독감 바이러스 변종처럼.


어떤 일들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다. 어릴 때라면 더 그렇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거의 없다. 심지어 내가 느끼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법조차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내 탓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나 때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순전히 내 탓이다. 선물도 내가 안 받으면 내 것이 아닌데, 왜 상처는 끌어안고 살아야 하나.


삶의 모든 사건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찾아내고 부여한 이유. 나에게 아픔을 준 사건을 곱씹어 교훈이라도 얻어내자.  '힘들다', '괴롭다'에 머물며 매몰되지 말고 긍정적인 의미를 찾자. 영혼까지 끌어모아 겨우겨우 병아리 눈곱만 한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더라도 괜찮다. 그것들이 모여 내 인생의 공기를 바꿔줄 테니까.

과거에 휘둘리지 않겠다. 내가 주체가 되어 해석하고 버리고 취하겠다. 이제 나는 내 삶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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