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5월 미리 미리 준비합시다
어린 시절에는 어린이날만 기다려졌다. 어른이 되고 나니 5월이 되면 대체 나는 또 무슨 효도를 해야 하나 하면서 부모님을 스캔하게 된다. 온갖 부모님 유행 선물을 다 독파해 고를 선물이 없는 자식이나 이번 생에 효도는 처음인 자식들을 위해 언제나 잘 먹히는 부모님께 편지 쓰기 스킬을 정리해봤다. 편지지에 펜만 들면 내가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고 있는 건지, 펜이 써지는 대로 내 마음이 조종당하는 건지 모르겠는, 그야말로 편지에 쓸 거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전수'라고까지 말하니 우습지만 나는 편지로 부모님에게 자주 감동을 주었던 딸이었다. 본가를 일찍 떠나야 할 때 아빠한테 미안해서 엽서를 쓰고 사라졌는데 아빠가 감동 받았다며 일찍 서울집으로 튄 딸을 이해해 주었다. (엄마아빠한테 화나거나 부당한 일(?) 당하면 글로 써서 따지는 딸이었음)
어버이날 편지 쓰기의 구조
감동을 위해서는 영웅 서사 뺨치는 구조적 설계가 중요하다. 나는 대체로 부모님께 편지를 쓸 때 [근황 토크 - 빌드업 - 부모 덕분에 극복한 감동실화 - 감사엔딩]의 구조를 따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평소에는 효도의 효도 생각지 않다가 어버이날에만 시즌성 효심이 오르는 자식도 충분히 이 구조를 따른다면 잘 쓸 수 있다.
1. 근황 토크
부모님은 은근 나의 근황을 모른다. 친구들은 잘 알고 있는 내 인생의 핫이슈를 엄마 아빠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내가 말 안 했기 때문에... 그러다가 어느 날 '내가 말 안 했었나?' 이렇게 되고, 꽤나 서먹해지기 쉽다.
부모님은 그렇게 무뚝뚝한 자식에게는 기대가 낮다. 그러니 편지 초입에 대강 써주자. 학교나 직장을 다닌 지 얼마나 되었고, 요즘 공부/일은 어떤지. 엄마아빠의 최근 근황을 물어도 좋다. 이런저런 걸 하고 싶다고/해봤다고 했는데 어땠는지 다음에 직접 얘기해달라고 조르는 식이다. 궁금하지 않아도 궁금해 해주는 게 사랑이니까.
여기서 포인트는 나 자신의 힘든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야근해서 죽겠다든지, 친구들이랑 사이가 안 좋아졌다든지 하는 것들은 대화나 전화로 하지, 부모님이 나중에 두고두고 볼 수도 있는 편지에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부모와 가까운 사이라면 최근에 재미를 느낀 취미나, 여행 다녀온 얘기를 써도 좋다. 다음에 또 같이 해보자 -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구조로 넘어갈 수 있다.
예시) 아빠 딸, 유빈이에요. 저는 퇴사 후에 매일매일 블로그를 쓰면서 지내고 있어요. 평소에 쓰지 않던 글을 쓰면서 기분 전환도 하고 좋아요. 다음에 아빠한테도 링크 보내 드릴게요.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바로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
2. 빌드업
어른이 된 우리에게 부모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밥도 맥여주고 잠도 재워주어야 자던 아이가 이제 사회의 일원이 되어서 멋진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증거를 확인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과정에 부모가 있었음을 쉬이 망각하고 마치 태어나서부터 '어머니 밥 주십쇼. 제 기저귀가 축축한데, 새 기저귀를 구매 후 착용하겠습니다' 하면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버이날은 그런 무지성을 뒤로 하고, 말도 못하던 내가 이만큼 성장한 데는 당신의 노고가 있었습니다-를 인정하는 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뜸 똥 기저귀 갈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쓰면 있던 감동도 사라질 테다. 작고 귀여운 디딤돌이 필요하다. 부모가 내 인생의 성장에 개입했던 아주 자잘한 순간들, 내가 삶을 살아가면서 드문드문 떠올라 나를 힘내게 했던 사랑이 묻어나는 말과 행동들을 살짝 언급해준다.
그것조차 생각이 안 날 수 있어 힌트를 준비했다.
[나는 '이럴 때' / '이것 때문에' 엄마 아빠 생각을 한다]를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1) 엄마아빠가 나에게 해주었던 말 한마디/행동
(2) 엄마아빠가 해주었거나 함께 먹은 음식 / 방문한 장소
(3) 내가 부족한 어떤 것을 부모가 도와주었던 일화
(4) (그것마저도 없다면) 얼마 전 내 꿈에 출현한 부모... 등등
설화라도 지어내라. 효도는 그런 것이다...(아님)
예시) 가끔 아빠랑 라면에 소주를 기울였던 시간들이 생각나요. 되게 소소한 순간이지만 집을 떠나와 있으니 아빠와 보냈던 그런 소소한 일상이 그리워질 때가 많아요.
***미안하다는 말은 빼기***
나는 보통 편지에 짜증 부려서 미안해, 잘 표현 안해서 미안해... 등등 미안하다는 말은 편지에 잘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말은 제발 직접 말했으면 좋겠다. 나는 대부분 그날그날 사과하고, 미안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버이날 편지에는 미안함은 뺀다. 가족 관계는 미안할 일 투성이고, 미안하다고만 하다보면 제대로 진심을 전할 공간이 부족해진다. 미안하다고 해도 또 저지를 실수 같은 걸 미안하다고 적기보다, 엄마아빠가 왜 좋은지 뭐가 고마운지 구체적으로 쓰는 편이 내 마음에도, 부모님의 마음에도 오래 남는 편지를 쓸 수 있다.
3. 부모 덕에 극복한 감동실화
2번의 빌드업을 잘했다면 이 부분은 아주 쉽다. 거칠고 험난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재, 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힘이 되었는지 쭉 서술하면 된다. 여기서 자식으로서 내가 마주한 고난이나 역경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사회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들을 서술하는 게 좋다. 갑자기 편지를 읽다가 대뜸, 너 이런 일로 힘들었어? 왜 말을 안 했어, 속상하게... 라는 피드백을 듣지 않으려면 처음 독립해서 낯설었던 순간, 사회생활하면서 남의 돈 벌기가 쉽지 않구나 느꼈던 순간, 인간관계에서 조건 없는 사랑이 당연한 게 아닌 것을 실감하는 순간... 정도를 쓰는 게 좋다.
그래서 결국 부모가 내 뒤에 있는 든든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살아갈 힘을 얻고, 나도 부모에게 그런 존재가 되기를 다짐하는 대목을 쓰는 부분이다. 이 정도만 써도 일단 꽤나 공감 능력이 높은 자식들은(부모 아님) 혼자 편지를 쓰면서 훌쩍인다.
예시) 회사에서 한참 저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과 술자리를 할 때에도 아빠랑 나눈 대화들이 참 많은 도움이 됐어요. 회사에서는 제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능숙한 친구라는 소리를 듣지만, 그건 모두 아빠와 예습을 했기 때문이겠죠. 낯선 서울 생활에서도 아빠가 저를 응원해주셨던 말들이 드문드문 많은 힘이 되어요.
4. 감사엔딩
대부분 감사 엔딩을 제일 잘 쓴다.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이 부분은 한글을 뗐을 무렵부터 주구장창 5월 8일에 반복한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해도 해도 부족한 말들이다. 우리 모두 부모의 기대대로 커 주지 않았지만, 그 기대를 꺾으면서 자라는 우리도 언제나 어여뻐 해주었음에 감사를 표현하자. 해준 게 없다고 말하는 부모에게 이 편지를 쓰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받으면서 자랐는지 적어 드리자. 매년 같은 감사만 표할 것 같지만 이렇게 편지를 쓰다 보면 놀랍게도 나를 낳은 부모의 나이와 가까워지면서 드는 감사는 언제고 다른 결로 부모에게 가 닿을 것이다.
예시) 서른이 되어 그래도 어느 정도 어른임을 인정받는 요즘이에요. 그러면서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많은 순간에, 아빠는 제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아주 많은 것들을 예습하게 해주었다는 걸 실감해요.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저랑 많은 대화를 나누어 주어서, 언제나 나에게 '유빈이가 최고다' 말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는 어디서나 아빠처럼 멋있는 어른일 수 있어요.
이렇게 콘텐츠를 쓰는 나도 내가 좋아하는 글은 그렇게나 많이 쓰면서 부모님께 편지는 잘 안 썼던 것 같다. 반성한다. 이번 어버이날에는 용돈도 좋지만 진심이 담긴 편지 한 장도 함께 드리는 건 어떨까?
감동 줄 수 있는 어버이날 편지 쓰기 꿀팁불속성 효자도 감동 줄 수 있는 어버이날 편지 쓰기 꿀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