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메모리얼 파크
ㅣ911 메모리얼 파크(National September 11 Memorial Park, Ground Zero)ㅣ
난 이제 더 이상 구글맵을 보지도 않고 걷고 있었다. 사실 체력이 다 되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각종 증권사가 밀집된 뉴욕 중권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와 트럼프가 소유하고 있다는 트럼프 타워(The Trump Building)를 지나,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취임식이 있었다는 페더럴홀 국립기념관(Federal Hall National Memorial)을 지났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 높이를 가늠하기 힘든 빌딩들이 빠짐없이 곳곳을 장악하고 있었다. 누가 더 높은지 내기라도 하는 걸까. 서로가 빛을 품어 반사시키며 더 이상 눈이 부셔 바라보기도 힘들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위엄이 넘쳤다.
그와는 무관하게 길거리 한 복판에서는 한가하게 쉬어가는 사람들과, 놀이터에 나온 것처럼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나도 저런 거 배워 보고 싶다....... 쩝.'
법과 제도엔 엄격하지만 남의 눈치 따윈 보지 않는 자유로운 나라. 진짜 뉴욕의 거리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생각지 못한 공원 하나가 나타났다. 바로 911 메모리얼 파크, 그라운드 제로(National September 11 Memorial Park, Ground Zero)였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를 당할 때 난 깨어 있었다. 생방송으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면서 충격에 휩싸였었다. 너무 놀라서 잠자고 있던 가족들을 다 깨워서 뉴스를 보게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때 테러를 당했던 1동과 2동에 거대한 인공폭포를 만들고, 그 외곽엔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추모공원을 만든 것이었다.
911 메모리얼 파크 인공폭포
거대한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이 폭포는 그 참사로 흘린 사람들의 눈물을 상징한다. 2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꽃과 국기를 들고 이곳을 찾아 그들의 허망한 죽음을 추모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가슴이 찡하게 아려왔다. 바로 옆에는 그때의 기록을 생생히 전시하고 있는 911 박물관이 있었지만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 솔직히 너무 슬퍼질까 봐 들어가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듣기에 911 박물관엔 출구가 여러 개 있다고 한다. 티슈도 여러 곳에 비치가 되어 있다고......
이는 관람객들이 깊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까 봐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세계무역센터 교통 허브
ㅣ세계무역센터 교통 허브(World Trade Center Transportation Hub)ㅣ
911 메모리얼 파크를 지나 조금 걸어 올라가다 보니 왼쪽 건물의 화려한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만화 주인공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카페였다.
지나는 남자 관광객 두 명이 내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자, 난 흔쾌히 그들을 벽면에 세워두고는 핸드폰의 셔터를 마구마구 누르기 시작했다.
'Hey, Do something! like this.' 난 어색해서 굳어있는 그들을 향해 여러 가지 포즈를 보여주며 외쳤다. 맨날 혼자 다니다 보니 내가 많이 심심했었나 보다. 그들은 부끄럽다는 듯 웃으면서도 열심히 내 포즈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다 찍고 난 후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캐나다인들이었다. 내가 여행 중 혼자 헤매는 중이라고 하자, 친절하게 몇 군데 관광명소를 알려주었다. 이미 내가 가 본 곳들이었지만 모르는 척하고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원한다면 자기들을 수행해 준 가이드를 소개해 줄 수 있다고도 했지만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그렇게 이방인들끼리의 만남은 끝이 났고, 난 다시 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911 메모리얼 박물관 곁에는 눈에 띄는 거대한 건축물 하나가 있다. 일명 오큘러스(Oculus)라고 하는 이 건물은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가 설계한 세계무역센터 교통 허브(World Trade Center Transportation Hub)이다.
난 처음에 이것을 보고 911 메모리얼과 관계가 있는 건축물인가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려 했었다. 그러다 이내 궁금증이 생겼다. 어떤 건축물이길래 저리도 멋있는가 하고. 가까이 가서 보니 입구가 있었다. 의아해하며 들어갔다. 한데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거대한 지하세계가 펼쳐져 들어오는 것이었다. 매우 현대적이고 아름다운 공간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맨날 칙칙하고 시끄러운 변두리 생활을 하다가 이런 것을 보니 도심의 호사는 다 누리는 것 같았다. 이곳은 뉴욕 내 인근 철도와 지하철들이 연결되는 환승센터와 대형 쇼핑몰이 있는 곳이었다. 뉴저지(New Jersey)로 가는 열차도 이곳에 있었다.
이 건축물은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편 새의 형상을 묘사해 만든 곳이라고 한다. 이곳을 본 순간, 나도 잠시 저질체력은 내려놓고 마음만큼은 이 새처럼 날 수 있었다. 다만 이 안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못 찾아 얼마나 헤맸는지는 비밀에 부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