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언제부턴가 퇴사 이후 으레 해야 되는 이벤트가 된 것 같다. 몇 개월 간의 유럽 여행이나 한 달 살기같이 긴 시간 여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인지 퇴사 이후 여행 안 가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나는 갈 생각이 없었다. 1인 가구인 나는 내가 여행에서 얻고자 하는 것들을 집에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대답에 많은 이들은 의아해하는 반응이었다. 나는 당당했지만 민망했다.
여행의 효용에 대해서 늘 의문을 품어왔다. 직장인이 되니 여행을 낙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 또한 여행 가는 것을 좋다고 느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정도에 비하면 나의 그 마음은 작고 작았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여행을 좋아할까? 왜 나는 그들만큼 여행을 좋아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나는 여행을 왜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것일까? 이따금씩 고민하다 실마리를 찾았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행이 전부 내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점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나라로 갈지, 어떤 비행기를 언제 탈지, 하루 세 끼는 어떤 것을 먹을지, 어떤 숙소에서 잘지, 어떤 곳을 방문해서 구경할지 등등 주체적으로 정하고 선택해야 될 것이 많았다. 여행지에서는 관광지를 다니는 것 외에는 책을 읽거나 멍 때리면서 내게 집중했다. 온전히 내가 주체가 된 그 느낌이 나는 좋았던 것이다.
주체적인 선택에 큰 의미를 부여한 이유는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선택할 것이 널려있지만 그것은 수동적인 경우가 많았다. 회사에서의 의사결정은 C레벨이 아니면 대부분 상사에게 맞춰야 한다. 업무적으로는 물론이고 점심 메뉴도 그렇다. 구내식당을 갈 때에도 비슷한 소스로 만들어진 음식들로 구성된 ABC라는 한정된 메뉴판에서 선택해야 한다. 외식을 하더라도 회사 근처 한정된 공간에서 골라야 하니 몇 년 지나면 선택지가 정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수동적으로 느껴졌다. 퇴근 후 시간을 보낼 때에도 선택지는 한정돼 있었다. 시간과 체력의 한계 때문이다. 운동, 요리, 약속, 쇼핑, 자기 계발.. 일상을 이렇게 주어진 틀 안에서만 선택해야 하니 어쩐지 답답함을 느꼈다.
그런데 여행을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제약이 줄어든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쉬고 싶으면 쉬어도 되고 책을 읽고 싶으면 읽어도 되고 번지점프를 하고 싶으면 번지점프를 할 수 있다. 세 끼도 자유롭게 내가 설계할 수 있다. 혼자 가면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이 좋았다. 선택을 제약 없이 할 수 있는데 그게 다 새로운 것이라니!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며 그것이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여행에 대한 결론은 오로지 내 기준으로 내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혼자 여행 가서 즐기는 행동들은 집에서도 할 수 있었다. 스스로 세끼를 세팅하고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고 큰 TV로 유튜브를 보면서 멍 때릴 수 있다. 1인 가구임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밖으로 나가서는 익숙한 동네의 지나쳤던 구석구석을 산책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기도 하며 생각이 정리되기도 한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로부터의 자극에서 벗어나 스트레스나 상처받지 않고 내게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나는 가질 수 있다.
결국 퇴사 직후에는 저마다 본인이 가장 좋아하고 필요한 일을 하고 싶을 텐데 나는 그것이 내게 집중해서 나를 돌보는 일이었다. 지치고 힘든 몸과 마음을 돌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고 혼자서 지낼 삶에 대한 의지를 예열하는 시간이 간절했다. 이는 오히려 여행을 가면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여행에 가면 새롭게 봐야 될 것도 많고 돌아다녀야 될 곳도 많기 때문에 관심이 '나'보다 '외부'에 더 집중될 것 같았다. 나 말고 새로운 것을 알아갈 필요가 없는 익숙한 장소에서 혼자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https://www.youtube.com/shorts/7pO8TnvsrsQ
얼마 전 본 쇼츠에서 배우 전도연이 한 말에도 깊이 공감했다. 영상에서는 휴가에 대해 여러 사람이 이야기한다. 어떤 이는 휴양지 바다 해먹에 누워서 책을 보는 것이라 하지만 배우 전도연은 다른 관점을 이야기한다. 휴가라는 것이 마음이 편하려고 가는 것인데 그것은 꼭 휴가가 아니어도 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어디여도 내 마음이 편하면 그것이 휴가고 휴식인 것 같고 휴가에 대해 강박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휴가에 대한 개인들의 입장은 다 맞다고 보지만 나는 이런 입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여행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긴 여행은 여전히 내 버킷리스트에 있다. 여행이 내게 도움 될 순간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해외파 친구들이 조언한 말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영국과 중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지내고 대학까지 나온 그녀들은 “네가 한국에서 안 해본 게 뭐가 있니. 이직도, 창업도, 유튜브도, 팟캐스트도, 이모티콘도… 해외만 안 가봤잖아. 해외 나가봐. 너는 해외가 맞을 것 같아. 나가면 지금 같은 고민은 안 할 것 같아.” 그녀들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듣고 여러 번 고민해 봤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여행을 찾을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했다. 여행이 주는 다른 관점이 필요할 때, 새로운 기회를 찾고 싶을 때, 다시 일정한 벌이가 생길 예정이어서 이제 다시는 쉴 수 없을 때다. 지금은 회사가 없는 삶을 살아낼 마음도, 몸도, 루틴도, 집안 환경도 갖춰놓아야 할 때라는 판단이었다. 이것이 가장 시급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라고 판단한 데에는 비용적인 이유도 있다. 여행은 벌이 없이 몇 개월을 버텨내야 하는 백수에게는 불리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오히려 돈을 써야 할 순간에 주춤하게 될 것 같았다. 퇴사를 한다는 것은 이제 대부분의 생활을 집과 동네에서 해야 한다는 뜻인데 이때 구비해 놓아야 할 물건이나 장치들이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다고 해도 다녀온 뒤에 이것들은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특히 내가 원하는 긴 여행은 이런 세팅에 특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퇴사 이후의 여행은 회사원일 때 갈 수 없는 장소나 기간을 선택해 한 달 살기 등 길게 다녀오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짧게 다녀오는 것은 내게 큰 영감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길게 다녀오려면 동남아를 가더라도 몇백만 원 정도는 가뿐히 든다. 그곳에서는 행복하겠지만 다녀온 뒤를 생각하니 조금 아찔해졌다.
심적으로 조급해질 것 같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1개월, 아니 몇 개월 여행을 다녀오면 돈도 떨어져 있고 백수가 된 시간도 이미 많이 지나있을 것이다. 이런 두려운 상황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퇴사 직후 여행보다는 집에서 나를 치유하고 앞으로 혼자서 자립할 때 필요한 도구를 사는 방향으로 정했다. 퇴사 이후 여행을 꼭 가야 할까? 꼭 가야 한다는 법은 없다. 각자의 가치관에 맞는 선택을 하면 된다.
* 다음 편에서는 퇴사 직후 여행 대신 2주일 동안을 어떻게 보냈는지, 무엇을 샀는지 공유해 보려고 합니다.
* 12년 차 직장인이 2024년 6월 무계획 퇴사를 하고 퇴사 전후의 생각과 회사로부터 자립하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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