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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a L Feb 16. 2024

헬싱키의 겨울은 길어요

북유럽의 겨울, 극야, 헬싱키



헬싱키에서 일을 시작한 지도 반년이 다 되어간다. 시간이 참 빠르다. 나는 더 이상 북유럽의 뜨거운 태양을 바라보고 있지도, 백야를 경험하지도 않는다.

한 10월부터였을까? 해가 급격히 짧아졌다.

12월-1월에는 오후 두 시인데도 해가 없어서 조금 당황하긴 했다. 대신에 거리마다 밝혀져있는 불빛이 나를 인도해주고 있었다.



헬싱키의 겨울풍경은 대충 이렇다. 이건 2월의 오후 3시쯤의 풍경이다. 12월-1월 사이에는 이런 게 극야이구나 싶을 정도로 해가 빨리 졌지만 2월이 되니 해가 차차 길어지는 중이다.



우리가 머무는 호텔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이딸라(ittala) 아웃렛이 있다. 친한 친구와 함께 그릇 쇼핑을 좀 하려고 걷기를 시작했는데, 20분이 웬걸, 눈이 녹아 꽝꽝 얼은 땅이 미끄러워 거의 40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우리가 좁은 보폭으로 바쁘게 걸어갈 동안 강아지들은 미끄럽지도 않은지 겅중겅중 잘도 걸어간다. 역시 인간이란 신체적으로 가장 기능이 떨어지는 생명체이다.



이딸라와 아라비아 핀란드 빈티지 컵들은 언제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신혼 생활을 앞두고 있거나 독립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에 푹 빠질 것 같다.





신혼생활도, 독립도 앞두고 있진 않지만 쇼핑을 잔뜩 한 나와 친구는 시티로 나와 저녁을 하기로 했다. 사실 우리 오늘, 동시 생일이다. 우연히 서로의 생일이 같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비행을 같이 가서 헬싱키에서 함께 생일을 기념하자 장난스레 얘기했었는데, 이렇게 실제로 비행을 함께하게 되었다.


운명적 만남이다.


생일을 기념하자는 말은 했지만 별다른 계획이 없던 우리는 일단 헬싱키 시티센터로 나가 또다시 좁은 보폭의 걸음으로 시티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귀여운 글씨체의 간판을 보고 이끌리듯 들어갔다.


'Olivia'



메뉴판도 귀엽다. 손으로 그린듯한 그림과 손글씨체의 이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는 보드카가 베이스로 들어간 Bella Olivia를 선택했고, 내 친구는 프로쎄코 한잔을 시켰다.


레스토랑에 앉아 분위기와 인테리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헬싱키 레스토랑 특유의 어두운 조명에 앤티크 한 디자인이 추위에 지친 몸을 녹여주는 기분이었다.


시져샐러드와 파스타 하나, 피자 하나를 시켰는데 양이 너무 많아 피자는 반 이상 남겼다.

사실 피자가 짜기도 했다.


헬싱키의 음식들은 흡사 미국 음식들처럼 간이 매우 세고 양도 많은 경향이 있다. 추운 지방 사람들이라 열랑이 많이 필요한 건지, 처음 트레이닝 때 와서 회사 급식을 보거나, 레스토랑에서 흔히 나오는 음식의 양을 보고 놀랐다.


내가 다녀본 유럽의 레스토랑 음식들 중 가장 양이 많고, 가장 간이 셌다. 그렇다고 해서 맛이 없는 건 아니다. 치즈나 하몽을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음식이 자동적으로 조금 짜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암튼, 한번 먹고 나면 속이 따뜻한 것이 날씨에 제격이긴 하다.


우리 앞 테이블에 앉은 커플은 각자 피자 한판을 시켜 먹고 있었는데, 우리가 나가기도 전에 피자를 모두 먹어 빈 접시만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이 저녁을 충분히 즐긴 것이 분명하다.


 


호텔에 돌아와 밤 열 시에 곯아떨어졌다. 역시 장거리 비행 뒤에 술은 위험하다.


오전 6시쯤 되자 해가 서서히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하도 밤이 길어 난 요즘은 호텔방의 암막커튼을 치지도 않고 그냥 잔다. 어차피 내가 일어나기 전에 해가 뜰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그러다 보면 자다가 잠시 눈을 떴을 때 이런 풍경을 보곤 한다.


이젠 익숙해져서 편안하고, 고요함이 평화롭다.


나는 요즘 별일 없이 산다. 2024년에는 서점에 가서 다이어리를 사고 싶은 욕망을 꾹 누르고 아이패드 다이어리를 대신 결제해서 이젠 그곳에 다이어리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 새해가 되어 바뀐 점이다. 작년까지 쌓아있는 다이어리들을 보며 나중에 굳이 열어볼 것 같지도 않은데, 종이를 이렇게나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어 방식을 바꿔보기로 했다.

나머지는 딱히 바뀐 것도, 바뀔 생각도 없다. 늘 새해 다짐을 한 페이지 가득 채우던 나는 이제 별로 다짐하지 않는다. 이런 걸 보면 내가 지금 행복한가? 싶기도 하다.

딱히 화낼 일도, 불편한 일도 없이 하루가 흘러간다.

일이 끝난 뒤에 건강한 조식, 그리고 산책 한 바퀴를 하며 느끼는 계절의 변화, 내가 사고 싶은 것 몇 개, 아름다운 곳에서 친구와의 저녁 한 끼, 숙면. 그리고 새벽의 그 평화로움이 가끔은 사랑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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