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마련. 사자성어처럼 들리는 이 단어를 쟁취하기 위한 전투에서 승리했다. 빠르면 빠르다고 할 수 있다. 결혼하고 1년이 안돼서 승전보를 울렸으니까 말이다. 48층 고지에 깃발을 꽂고서 환호했다. 내 집이 생겼다! 풍악을 울려라! 등기권리증은 승리를 확인시켜주는 증빙문서였다. 자격증, 운전면허증 등 다양한 '증'들을 살면서 취득했지만 이만큼 날 기쁘게 해 준 건 없었다.
등기권리증을 받아 든 지 반년이 흘렀다. 그때의 기쁨은 사라진 지 오래다. 현실로 돌아와 주위를 둘러봤다. 뉴스에서는 연일 치솟는 부동산 시장을 보도한다. 내 집만 오르는 게 아니었다. 무주택자, 1주택자, 다주택자 너나 할 것 없이 K-부동산 시장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다. 정녕 이게 올바른 현실인지 의구심이 든다.
이 현실 속에서 든 생각은 집은 필수재란 것이다. 시장이 어찌 돌아가고 있던지 간에 거주 안정성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집을 갖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집이 생긴다고 내 삶의 질이 수직 상승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현실은 매달 나가는 대출이자, 관리비, 기타 고정비용에 휘둘려 살게 될 것임을. 집을 사고 보니 내 생각은 들어맞았다. 살면서 필요한 의식주 중 '의(衣)'와 '식(食)'이 '주(住)'에 좌지우지되는 삶이 됐다. 내 의식(衣食)은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옷과는 의가 상한 사이가 됐다.
집을 사고 나선 옷 쇼핑과는 거의 의절하게 됐다. 나는 원래 보통 남자들에 비해 쇼핑에 관심이 많았다. 플렉스 한다고 명품 브랜드에서 가방, 카디건도 사봤고, 평소 입는 옷도 꽤 비싼 브랜드에서 자주 사들였다. 나에게 주는 선물이고 내 외적 가치를 위한 투자라 생각하며 옷 쇼핑에 월급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좋은 옷을 입었을 때 밀려오는 기쁨은 종종 날 구름 위로 뜨게 해 줬다. 구름 위에서 바닥에 있는 내 통장잔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 구름의 이름은 할부였다.
지금은 다르다. 일단 신용카드를 쇼핑에 되도록 쓰지 않는다. 갖고 있는 신용카드도 주유비, 아파트 관리비, 통신비 등 청구할인 혜택을 챙기기 위해 고정지출 자동이체 용으로 쓰는 거 하나다. 이외 쓰던 신용카드들은 다 잘랐다.
남은 신용카드로는 강의비용 정도를 제외하곤 절대 할부로 결제하지 않는다. 신용카드를 잘라내고 체크카드를 쓰다 보니 할부는 조삼모사임을 깨달았다. 자연스레 비싼 옷을 살 여력도 없어졌을뿐더러(원래도 없었지만 할부에 속아 넘어갔다) 관심도 사그라들었다. 사더라도 저렴한 SPA 브랜드 몇 번 가서 산 게 전부다. 그마저도 정작 매장에 가면 딱히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빈손으로 나오곤 한다.
이미 갖고 있던 옷들도 일부는 중고마켓으로 정리하고 손에 가는 옷들로만 옷장을 채워놨다. 옷장에 걸린 옷들을 보며 다행이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옷 쇼핑'과는 의절했지만 옷 자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남아있다. 만약 늦바람이 불어 지금 옷을 사재꼈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테다. 내가 좋아하는, 가치를 가진 옷들을 이미 갖춰놨기에 옷 구매에 큰돈이 들어갈 일은 앞으로 잦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이 든다.
먹는 건 아끼지 말랬는데...
아버지에게 받은 가르침 중 하나는 먹는 건 아끼지 말라였다. 그 가르침을 잘 받들어 살아왔다. 집을 사고 난 뒤 가르침의 방향을 조금 틀었다. (내가) 먹는 걸 아끼자. 이 문장 속 괄호의 (내가)는 대개 (우리 부부)로 치환되곤 한다.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대화가 곁들여진 식사자리는 우리 삶을 빛내주는 순간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은 돈이 든다. 외식, 배달, 심지어 장바구니 물가까지 오른 요즘엔 먹거리만으로도 지출이 상당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굶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외식과 배달은 주 1-2회 정도로 절제하고, 그 외는 대부분 집밥을 먹기 위해 노력하기로.
외식 같은 경우 비싼 음식점은 기념일이나 부모님을 모시는 등 중요한 때만 이용한다. 배달도 마찬가지다. 야식이 급 당긴다고 무조건 시키지 않는다. 건강에도 좋지 않고 몸에게 죄책감이 든다.(라고 아내에게 설득한다.) 집밥은 저렴하나 그만큼 수고로움이 든다. 다행히도 양가 어머님들의 뛰어난 음식 솜씨 덕에 냉장고 안은 항상 맛깔스러운 반찬들과 김치가 사시사철 대기 중이다. 딱히 먹을 게 없더라도 밑반찬만으로도 한 끼 해결은 가능하다.
내 개인적으로는 술자리도 많이 줄였다. 사회적 거리두기 영향도 무시 못하지만 사람들과의 만남 빈도를 조절하고 있다. 초저녁에 만나 반주를 기울이고 가볍게 2차까지 맥주라도 마시게 되면 한 번 만날 때마다 4,5만 원은 기본으로 쓰게 된다. 예전에는 이 정도쯤이야 쓸 수 있다 가볍게 넘겼다. 예정에 없던 약속도 당일날 바로 잡아서 술을 마시곤 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술자리 때 쓰는 돈이 꽤 크게 느껴진다. 예정에 없던 술 약속은 퇴근 후 해야 할 루틴을 해친다. 돈도 아끼고 나 스스로를 조절하기 위해서라도 잦은 약속은 잡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자주 본다고 해서 상대방과 그만큼 돈독해지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또 나이가 들면서 내 또래들도 각자 가족이 생기고 생업에 바빠지며 자주 볼 기회도 자연스레 적어졌다. 1년에 한두 번 정도만 봐도 관계는 유지된다는 걸 체득했다. 이 깨달음 덕에 주류비도 아끼게 됐고 인간관계가 주는 속박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또 한 가지 절약하는 분야는 커피다. 재테크 분야 책이나 증권사 광고 등에서 커피 1잔 값과 관련한 이야기가 많이 보인다. 하루에 커피 한 잔 값 아끼면 1년이면 얼마가 된다는 둥. 커피 한 잔 값으로 시작하는 미국 주식까지 다양하다. 살면서 커피값 아끼기를 실천하니 실감이 난다.
커피값 아끼기 프로젝트는 사실 회사 부장님 덕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작년에 우리 부서로 부임하셨는데 캡슐커피를 좋아하셨다. 부장님 덕에 사무실에는 네스프레소 커피머신이 생겼고 다과 창고에는 향긋한 커피 캡슐이 가득 들어찼다. 출근길 프랜차이즈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할 필요가 없어졌다. 사무실에 들어와 항시 대기하고 있는 커피머신의 전원만 켜면 그날의 커피는 해결된다.
캡슐커피만 마시다 보니 가끔씩은 별다방 커피가 당기기도 한다. 그럴 때면 아껴뒀던 기프티콘을 쓰거나, 시즌 음료 한 잔에 별 세 개 적립 이벤트가 있을 때 부리나케 달려가 이 한 잔은 세 잔의 가치라 생각하며 사 마신다. 커피값을 아끼게 되니 평일에 약속이 없으면 나 혼자 쓰는 돈은 만원에 못 미친다. 구내식당 점심값(4,800원), 출퇴근 왕복 교통비(3,100원). 심플한 삶이 됐다.
바뀐 의식
거주의 문제가 해결된 뒤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먹고 쓰는 데 있어서 한 번씩은 더 고민하고, 주저하게 됐다.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도 금전적인 부분을 없지 않아 생각하고 있다. 팍팍해보일 수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삶에 정말 필요한 물건들만 살 수 있는 판단력이 커졌고, 자주 못 보는 만큼 지인들과 만나는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됐다. 집을 사지 않았더라면 이 깨달음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알게 됐다. 집을 샀다고 내 삶의 질은 수직 상승하지 않았으나 삶의 나침반은 옳은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덜 쓰고 덜 먹는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매달 나가는 대출이자, 관리비, 고정비용은 날 휘두르는 게 아니라 내가 제대로 살고 있다며 타일러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衣食)에 앞서 내 삶의 의식(意識)이 바뀌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