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서재가 생겼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회장님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고급스러운 목재로 만든 큼지막한 책상과, 벽면 한 편을 꽉 채우는 책장이 있는 서재를 갖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그 회장님들의 화려한 삶보다 그들의 서재가 더 빛나 보였다. ‘고급스러운 서재=성공’이라는 공식이 어느샌가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래. 나중에 크게 성공해서 나만의 서재를 가지는 거야. 책장에는 한가득 책을 채우고 원목 내음이 은은하게 풍길 책상에 앉아 성공을 누려야지.’
이 원대한 로망은 성인이 된 이후로 꽤 오래 품었지만 실현하지는 못했다. 대학교 입학 후에는 삐걱거리는 2층 침대와 낡은 나무 냄새가 풍기는 책상이 비치된 20년 된 기숙사에서 1년을 보냈다. 책장에는 전공서적과 잡동사니로만 가득했다. 기숙사를 나온 뒤에는 졸업 때까지 줄곧 학교 근처 원룸에서 자취했다. 내 한 몸 뉘이기도 좁은 방에 로망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서재에 대한 로망이 점점 사그라져 갈 즈음 취업을 했다. 어엿한 직장인이라면 모름지기 나만의 방을 꾸며야겠다 생각했다. 투룸 정도 되는 공간이 생긴다면, 내 스타일대로 인테리어를 해보자 마음먹었다. 입사 후 1년 간 사택살이를 마치고서 시내 번화가에 투룸을 얻었다. 나름대로 집을 꾸며봤으나, 독립적인 서재를 갖추기엔 무리가 있었다. 내가 살던 투룸은 안방 하나와 거실과 주방이 미닫이 창으로 구분된 구조였다. 안방에는 저렴하게 구매한 책상과 책 몇 권을 침대 옆 안방에 두었다. 독립적인 서재는 아닌 셈이었다. 내 로망은 이렇게 로망으로만 남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꼭 서재를 갖고 싶다는 마음은 멀리 떠난 낭군님을 연모하는 아낙처럼 커져만 갔다. 망부석이 되어갈 때쯤 간절하던 나의 바람은 올해 들어 생긴 우리 부부의 집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방 3개 중 안방, 옷방을 제외한 남은 공간을 내 서재로 쓰기로 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고등학생 시절 이후 15년 여만에 수복한 나만의 공간이다. 비록 꿈꿔오던 회장님 서재만큼 크지 않고 책장의 책들은 벽면을 다 채우진 못했지만, 내 마음을 채워줄 정도로 서재는 아늑하면서 내 취향이 가득 담겼다. 서재라는 공간을 통해 나에 대해 말해줄 수 있을 정도로...
집 계약을 한 뒤 꽤 오랫동안 이 공간을 어떻게 꾸밀까 고민을 했다. 붙박이장이 기본 옵션으로 들어간 작은방이다. 그만큼 컴팩트하게 서재에 필요한 가구를 들여놔야 했고 최대한의 효율과 심미성을 갖게끔 배치해야 했다. 주안점을 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1. 낮에는 재택근무와 글쓰기, 독서의 집중도를 높여줄 수 있는 공간
2. 밤에는 책을 읽으며, 아내와 (때때로)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
낮과 밤의 모습이 사뭇 다르지만, 그 시차를 서재는 무리없이 메워냈다. 내가 원했던 대로의 기능을 서재는 훌륭히 수행해내고 있다. 파란 카펫을 깔아 오랫동안 닿아있을 발에 온기를 더해주고, 눈은 덜 피로하도록 했다. 창문을 바라보게끔 책상을 배치하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어디선가 주워들었다. 그래서 의자는 창문을 등지게 두었다. 책장은 이사를 오며 조금 더 큼지막한 걸 추가로 하나 구매했다. 손이 잘 가지 않는 책들은 처분하고 오랫동안 읽을만한 책들만 책장에 두었다. 넉넉한 책장을 내 취향의 책들로 채워가는 재미가 생겼다. 밤에는 책과 함께 곁들일 위스키, 와인도 책장에 비치해두었다. 책을 읽으며 술을 마시면 그날 밤 숙면은 보장된다.
첫째, 내 취향대로 꾸민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능률적으로 내 할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이전에 살던 집에선 재택근무를 할 때, 다이닝룸에 있는 식탁에서 노트북을 올려놓고 일을 했다. 회사로 치면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탕비실에서 일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내가 집에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산만해지기 일쑤였다. 밥때라도 되면 부산스러운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아내가 보여서 무어라도 해야만 했다. 테이블에 음식이 놓이면 노트북을 한편에 치워놓고 식사를 하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주방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아내의 도움 요청이 있을 때 거들어주면 된다.
둘째, 공간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에 비례해 서재 체류 시간도 길어졌다. 몸이 가까워지니 마음도 가까워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한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달았다. 푸른 카펫이 깔린 바다 같은 방바닥에서 서재는 한 척의 작은 배가 되어 날 어디든 실어가 준다. 과거의 빛나던 추억 속으로 공상에 빠지기도, 내 역사를 이루는 하루하루의 일상들을 채워가며 다가올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서재라는 배 안에서 나는 선장이자, 조타수이자, 항해사다. 서재는 내게 자유를 줬고, 그만큼 나는 서재를 애착하게 되었다.
서재는 내가 그동안 꿈꿔왔던 나만의 독립된 공간이다. 꿈꿔왔던 공간에서 내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서재에서 앞으로도 많은 걸 읽고, 쓰고, 마시고, 생각하며 시간을 채워 나갈 테다. 으리으리한 서재가 아니여도 좋다. 30대인 내게 이만한 크기의 서재면 충분하다. 앞으로 나도, 서재도 키워가면 될 일이다. 서재라는 작은 배에 닻을 올리고, 망망대해 같은 세상 속에서 노를 저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