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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Dec 30. 2021

그날의 엄마가 되어...

시계를 보니 저녁 11시가 다 되어간다.  

     ‘무사히 넘어갔군… ‘

     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려고 노트북 전원을 껐다.  

     “엄마!!!”

     갑자기 방에서 딸아이가 뛰어나오며 나를 부른다. 

     “엄마 그거 알아? 오늘 어린이날이야!!!” 

     약간 흥분된 톤의 영어로 아이는 내게 한 방을 날린다. 

     “어? 진짜? 세상에 엄마가 어떻게 그걸 잊어버렸지?  아고 미안.”

     완벽한 연기였다.  

     그나저나 또래보다 키도 크고 성숙하다는 말을 듣는 아이지만 역시 우리 딸은  만 11세 어린이였다.  

     ‘그래, 아직 네가 어린이라니 엄마는 행복하구나.’ 

     하나뿐인 딸이 너무 빨리 자라는 게 아쉬웠고 사춘기가 다가오는 요즘 부쩍 엄마와 거리를 두는 느낌에 서운하던 차였다.  스스로 어린이날을 챙기는 모습을 보니 아직은 품 안의 베이비가 맞다 싶어 안도감도 들었다. 

     “초등학교 졸업하면 이제 청소년이니 올 해가 마지막 어린이날이네? 기념으로 뭐 하고 싶어? 우리  내일 쇼핑 갈까?” 

     “응! 오키!!” 

     만만한 쇼핑으로 일단락 지었다.  




 다음날 학교 끝나고 돌아온 딸아이와 바로 근처 쇼핑몰로 향했다.  특별히 사려는 목표물이 있던 게 아니라 우린 여느 때처럼 1층부터 쇼핑몰 이곳저곳을 기웃대고 다녔다. 먼저 펫숍에 들러 꼬물거리는 강아지들을 넋 놓고 구경했다.  

      “아,  너무 귀여워, 데려가고 싶다 엄마.” 

     “그래도 우리 사피랑 몽이만큼은 아니다, 그치?” 

     “맞아 우리 냥이들이 젤 이뻐.”  

     언제나 그렇듯 아쉬움을 달래며 돌아서는 우리들 만의 주문이다.  


 층마다 아이가 좋아하는 패션 브랜드 숍이나 문구점을 기웃대고 꼭대기에 있는 서점에 들른다. 둘 다 제일 좋아하는 곳이다.  전에는 서로 읽는 책이 전혀 달랐는데 어느새 커서 내가 읽는 책을 아이가 보기도 하고 아이가 재미있다는 책을 내가 읽기도 한다. 오늘은  내게 읽어보라며 무인도에 고립된 아이들에 대해 쓴 최신 미스터리 소설을 보여줬고 나는 딸아이에게 <파리대왕>도 비슷한 스토리라며 읽어보라고 권해 주었다.  

 

 몇 권의 책을 고르고, 하늘색 니트 크롭탑 하나를 산 뒤 단골 코스인 밀크티 가게로 발길을 돌렸다.  좁은 쇼핑몰 복도를 걸어가는데 앞에서 바닥 청소차가 다가왔다. 앞 서 걸어가는 딸아이에게 옆으로 좀 비켜서라고 말하려는데 청소차가 나보다 빨랐다. 차의 바퀴가 아슬아슬하게 딸아이의 발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이 왜 이리 더디 흘러가는지 찰나이지만  시간이 느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화를 버럭 내고 말았다.  


     “ 넌 대체 왜 그러니? 앞에 차 오는 거 안 보여?”

     “옆으로 비켜 서야 할 것 아니야, 방금  저 차가 네 발 밟고 지나갈 뻔했어. 엄마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알아?” 

     딸아이는 내가 화내는 걸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길 다닐 때 딴생각하고 음악 듣고 그러지 마! 사고는 한순간이라고! 알겠어?”

     아이는 기분이 상했는지 대답이 없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이와의 즐거운 마지막 어린이날 기념 데이트는 어색한 침묵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엄마가 아까 화내서 미안해.” 

      자려고 돌아 누운 딸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이는  듣고 있는지 잠이든 건지 조용했다. 

     “엄마도 너처럼 어릴 때 다치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면 네 외할머니가 무섭게 화를 내는 게 이해가 안 갔어.  너도 이다음에 크면 엄마가 무슨 말하는지 알 거야.” 

     정말 그랬다. 어릴 때는 내가 부주의할 때나 다칠 때면 왜 그렇게 화를 내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엄마가 되고 나니 누가 설명해 준 것도 아닌데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노을이 내려앉고 밥 짓는 냄새, 들 판에 지푸라기 태우는 냄새가 솔솔 나던 가을날이었다. 오빠랑 동네 아이들과 집 짓는 공사터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작은 마을에 양옥집을 짓는 공사터였고 지금처럼 공사 부지를 높은 울타리로 막아 놓거나 하는 안전장치가  없었다. 당연히 엄마는 늘 그곳에 가서 놀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다. 애타는 부모들 마음과 달리 숨을 곳이 많아 그곳은  동네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터였다. 그날도 아이들과 숨어든 나는 술래가 되어 열심히 뛰어다녔다.  

반쯤 쌓은 담벼락 뒤로 동네 아이의 정수리가 얼핏 보였다. 나는 신나게 그쪽으로 달음박질을 했다.  그 순간 느껴본 적 없는 예리한 통증이 발바닥을 지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발을 내려다보니 내가 밟은 것은 녹슨 못이 박혀 있는 나무토막이었다.  피가 슬리퍼 주변으로 흘러내렸다.  발을 들어 올리자 그제야 통증이 실감이 난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야단 났다. 엄마한테 혼나겠어.’ 

     혼날 일이 두려워 아픔 따위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두 살 많은 오빠가 무슨 일인가 하고 멀리서 달려왔다.  

     “왜 그래? 다쳤어? “ 

     “오빠, 엄마한테 말하지 마.”  


 나는 그렇게 한마디를 내뱉고 발을 절룩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길마다 핏방울이 발자국처럼 남았지만 오로지 집으로 들어가서 밴드를 붙이고 아무 일 없는 척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피를 씻어내려고 욕실로 들어갔다. 수도꼭지를 틀려는데 욕실 문이 벌컥 열리고 엄마의 떨리는 눈망울과 마주쳤다. 범행을 저지르기도 전에 마루에 흘리고 온 핏자국에 발각이 되고 만 것이다. 번개처럼 달려든 엄마는 나의 발을 잡고 상태를 살폈다.  

     “어디서 이랬어? 세상에! 엄마를 불러야지 이러고 어디서부터 걸어온 거야!!”  

     나는 그제야 눈물을 터뜨렸다.  

     “저기 집 짓는데서 … 애들이랑 숨바꼭질… 했는데… 못이…. 나무에…. 나도 모르고 밟았어… 엄마 잘못했어.”  

     “엄마가 거기 가지 말랬지!!! 내가 못살아 정말. 너 병원 다녀와서 아주 혼날 줄 알아!!”  

      엄마 손에 이끌려 근처 정형외과에 가서 주사도 맞고 상처도 치료도 했다. 그날 저녁 오빠와 나는 팔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두 팔을 들고 벌을 서야 했다. 나는 금지된 곳에 가서 숨바꼭질을 한 죄보다 다친 것을 숨기려 한 죄 때문에 더 혼이 났고 오빠는 동생을 말리기는커녕 같이 가서 놀았다며 가중 처벌을 받았다. 다쳐서 이렇게나 아픈데 얼마나 아프냐고 안아주지는 않고 화만 내는 엄마가 정말 미웠다.  

     ‘난 주워 왔어. 엄마는 계모인 거야.’ 

     이런 날이면 내가 백일 사진이 없는 게 주워 와서 일거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점점 더 화끈거리는 발 때문에 울고, 엄마한테 혼이나 울다 지친 나는 눈물에 머리카락이 말라붙은 채로 잠이 들었다.   


 잠결에 아픈 발이 시원한 느낌에 살며시 눈을 떴다.  발치에 앉아 아픈 발등에 얼음찜질을 하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나는 스르르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날의 엄마가 되어 나는 잠든 아이의 머리칼을 살며시 쓰다듬는다.  숨소리가 쌔근쌔근  편안하고 고르게 들려온다.  그 밤 엄마가 들었을 내 숨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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