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마이크 May 19. 2023

그때 그 시절 N잡러, 60년 경력

최윤경미용학원 원장님 인터뷰

“떠도는 그대 영혼의 눈이 내린다. 닫혀있는 거리, 아직 임은 돌아오지 않고 종말처럼 날이 저문다. 가난한 날의 그리움도 죄가 되나니 그대 더욱 목메이라고 길이 막힌다. 목설 속에 하늘이 무너지고 이 한해의 마지막 언덕길이 지워지고 있다” - 최윤경 시집 ‘십이월’ 중에서. 


한 장소에 오래 머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스스로 오해하고 있던 지점을 발견했다. 정말이지 ‘한 가지’에만 몰두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예외가 있다고 알려주듯 최윤경 미용학원의 최윤경 선생님을 만났다. 그는 1968년 지역에 최초로 미용학원을 차렸으며 12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다. 학생들에게 외면을 가꾸는 법을 알려주는 동시에 스스로의 내면을 가꾸기 위해 자신만의 철학을 담은 시를 쓰는 시인이다. 정말이지 그 시대에 N잡러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순탄치 않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미용을 반대하던 아버지의 곁을 떠나 몰래 배우고,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지만, 그 시절 미용은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미용은 기술을 넘어선 예술적인 것이었다.


지금은 직업훈련시설이 많이 들어섰지만,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직업훈련시설보다는 학원들이 더 많았다. 그 당시 취업을 위해 미용학원에 다니는 이들이 많았기에 미용학원 원장은 경쟁력 있는 직업군 중 하나였다. 익산에 특히 미용실들이 많은 편인데, IMF 당시 산업 여건이 열악했던 섬유와 보석가공 산업들이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대량의 실업난이 발생했다. 실업자들은 새로운 직업을 찾고자 전문학원 등을 찾게 됐는데, 미용은 취업과 창업이 쉬워 많은 사람이 도전하는 분야였다. 그중에 대표 학원이었던 최윤경 미용학원을 찾아 인터뷰하기로 했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내가 어느 정도 답변을 예상하고 던진 질문에 계획처럼 딱 들어맞는 순간이 오기도 하고, 의외의 답변으로 우연성을 맞이하기도 한다. 최윤경 선생님과의 인터뷰에서는 어떤 답변도 내 예상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미용에 대해 물었지만 시인의 삶에 대한 답변이 왔고, 한자리에 오래 머문 마음에 대해 물었더니 해외 유학 생활에 대한 답변이 돌아왔다. 예상과 달리 풍부한 이야기가 돌아오면 우연성이 더해져 인터뷰가 풍성해진다. 최윤경 선생님과의 인터뷰가 그랬다. 


그가 미용과 시와 유학과 종교로 삶을 버무려 가는 태도는 그를 욕망으로부터, 타인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게 한 계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녀와의 인터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유와도 같다. 


미용학원 운영하면서 미스코리아 후원도 같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익산에 미스코리아가 없었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달까요. 서울로 데려가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케어를 해 줬죠. 미스코리아는 수영복을 입으니까 몸까지 다 보여 줘야 하거든요. 미용은 사람을 가꾸는 직업인데 저는 학원 선생님이니까 남을 가꾸는 법을 가르쳐야 했죠. 


같이 대회 나갔던 분 중에 기억에 남는 분도 있으신가요? 

그 당시에 최현경 자매가 있었어요. 언니가 처음에 왔는데 너무 예쁘더라고요. 조금만 가꾸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어요. 근데 집안 형편이 워낙 어려워서 제가 무료로 후원했어요.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자매 둘 다 가서 성공했죠. 엄마가 자기가 처녀 때 자기 춘향이 나가는 게 그렇게 부러웠대요. 저를 찾아와 줘서 고맙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가꾸는 일을 남들에게 먼저 보여 주신 거군요.

그쵸. 미용은 글자 그대로 아름다울 미(美)와 스승 사(師)를 쓰거든요. 거든요. 제 생각에 미용실은 창작을 하는 곳이고, 학원은 교육하는 곳인데 저는 두 가지를 다 겸비했죠. 학원 오픈하기 전에 미용실을 열었었는데 직원들의 숙련도가 성에 차지 않더라고요. ‘아, 내가 제대로 된 미용 교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이리역 폭파사건을 직접 겪으셨다는 인터뷰 내용이 기억에 남아요. 그때 기억을 시로 남기기도 하셨죠. 

‘재난의 길목에서’라는제목으로 시를 썼어요. 익산역 앞에 기념비에 새겨져서 남아 있죠. 당시의 소리, 풍경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잊지 않고 싶은 마음으로 썼어요. 사람마다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어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 점점 희미해지더라고요. 저는 잊지 않기 위해 시를 써요. 그게 제가 택한 방법이에요.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 처참한 불행 / 산천초목도 울고 갈 이리역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 / 생과 사의 갈림길 속에서 가냘픈 한 마리의 사슴처럼 / 나는 길을 잃고 헤매었습니다.


무어라 말을 하랴 이 비극 이 아픔을 / 다만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처럼 / 우리들을 인도하는 따뜻한 동포애를 /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 지난 삼십팔 년 전 이날 이 자리


쾅 하는 굉음소리에 세상은 암흑이었고 / 갈 곳 없이 헤매일 때 님들의 몸과 팔다리 / 

낙엽처럼 발밑에 걷어 채이며 / 부모·형제 부르며 울부짖는 소리 / 밤하늘에 메아리 되어 돌아올 뿐


잿더미 되어 버린 그때 그 현실 앞에서 / 가신님들의 영혼들을 기리기 위해 / 오늘 여기 이 자리에 모였으니 / 뚝뚝 떨어져 쌓이는 낙엽 따라 가신님들이여 /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길이길이 영원히 안식하소서


시를 쓸 때는 주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쓰시나요?

시는 소설이나 수필이랑 다르게 짧잖아요. 함축적인 글로 표현해야 하니까 더 어려워요. 길게 풀어서 쓰는 것도 어렵지만 설명을 보탤 수 있잖아요. 수필이 이야기를 더해서 설명한다면 시는 이야기를 덜어가면서 글을 써요. 그래서 시를 좋아해요. 간결하고, 명확하잖아요. 제가 사는 삶이랑도 많이 닮았어요. 


그럼 원장님과 시인님 중에 어떤 호칭으로 불리는 게 좋으신가요?

똑같아요. 시는 제가 좋아하고, 원장은 제가 택한 거죠. 둘 다 똑같이 좋아요. 


원장님 어릴 적에 해외에서 공부도 많이 하셨다고요. 해외 생활도 궁금해요.

미국 라스베이거스, 하와이. 왜냐면 미국은 전 세계가 다 모이니까. 미국에서 살지는 않아도 여기 어머니도 아프시고 여러 가지가 여건이 그래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 내 통장 하나도 뉴질랜드 은행에 있는데, 못 찾고 왔지. 


혹시 통장에 돈이 많이 들어 있나요? (웃음) 

많이 들어 있진 않아요. 통장 가지러 가는 것보다 가지러 가는 비행기 표가 몇 백은 더 들 거예요. 그냥 놓고 와 버렸지. 


종교도 가지고 계시네요. 유리안나라는 세례명도 가지고 계시고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는 게 꿈이었어요. 기도하고, 걷고, 정말 제가 생각하는 완벽한 삶이거든요. 지금은 몸이 성치 않아서 실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하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지금 이곳에서만 60년을 머물고 계신 거잖아요. 

김제에서 태어나고, 초등학교까지는 거기서 살았어요. 장황에서 학교 다니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죠. 


학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다른 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셨는지 궁금해요.

나는 이사 다니는 걸 안 좋아해요. 짐 옮기고 어찌고 저쩌고 하면 정말 신경 써야 할 게 많죠. 그리고 여기가 좋아요. 익숙하고. 그래서 안 옮기는 것도 있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한 곳에 오래 있냐고, 대단하다고 물어보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익산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여기에 있는 거죠. 


최윤경 선생님은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대단한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내가 필요한 일이었고, 할 수 있는 일이라서 그렇게 했다는 것. 부모님의 반대에도, 재난의 길목에서도, 여러 우려도 그의 앞에서는 핑계에 불과했다. 본질을 위해서는 어떤 수고스러움도 이겨 낸 그의 삶을 돌아보니 60년 세월의 저력이 납득이 갔다. 

이전 08화 떡은 간만 맞으면 맛 없을 수가 없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