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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유 Oct 21. 2023

마법의 문장 “투룩체 빌미요룸, 튀르키예어 몰라요!”

“고양이… 작다… 밥… 집… 크다… 아기… 밥?”

할머니가 고양이를 가리키고 말씀하시면서 고개를 흔든다. “고양이가 작아서 우리 집에 있는 성묘용 사료를 못 먹어. 아기용 사료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도톰한 누빔 조끼에 국물 한 두 방울 튀어도 비눗물 묻혀서 몇 번 비비면 깨끗해질 것 같은 광택 있는 바지를 입은 할머니, 목재와 철근에 수없이 쓸렸어도 꿋꿋하게 버텨온 색 바랜 청바지를 입은 공사장 일꾼 아저씨 그리고 나. 세 사람이 나란히 쭈그려 앉아 차 밑에서 빽빽 우는 노란 아기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다. 


“아기 밥 있어. 물 있어.”

“밥”을 말하는 타이밍에 오른손에 든 사료를, “물”하고 말할 때 반대편 겨드랑이에 껴 둔 물병을 보여드린다. 할머니는 “좋다… 아기… 밥… 물... 좋다.”을 말하고 환하게 웃으신다. 저 말은 아마도 “너 아기 고양이용 사료가 있구나. 너무 다행이다.”일 것이다. 할머니가 아저씨에게 이야기하고, 아저씨가 어디선가 커다란 통을 주워 온다. 할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흙을 퍼 담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늘어나고 다 같이 아파트로 들어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몰라서 아저씨한테 묻는다. 

“고양이, 어디?”

“고양이… … …”

“고양이” 밖에 못 알아 들었지만 아저씨가 할머니를 한번 가리키고 위를 가리켰으니, 아마도 여기 아파트 위층에 사는 저 할머니가 데리고 가신다고 말씀하신 것 같다.


튀르키예에 산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외국인으로, 통역해 주는 사람 없이 사람들과 가장 오래, 적극적으로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복기했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있는 말줄임표에는 내가 알아듣지 못했을 뿐, 사람들이 구사한 완전한 문장 속 단어들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유창하게 문장을 말하고 나는 더듬더듬 단어를 듣는다. 


외국에 살면 자연스럽게 그 나라 언어를 (잘) 하게 되는 줄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튀르키예어를 어느 정도 유창하게 구사할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의무감과 부담감을 느낀다. 


외국어 잘하는 방법을 검색하면 한때 성스러운 체험 수기들이 쏟아지지 않았던가? 외국어 콘텐츠를 계속 틀어 놓고 생활하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문장들이 천천히 분절되어 단어가 하나씩 또박또박 들리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시작했다는 경험담들. 어쩌다가 귀가 뚫렸어, 어느새 입이 터졌어하는 이야기들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마법의 나라에서나 이루어지는 일들이었다. 적극적으로 배우지 않으면 아무리 들어도 외국어를 깨치기 어렵다.


튀르키예어가 없는 자리를 눈치, 손짓, 몸짓, 표정으로 채운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거나 시장에서 야채를 고를 때, 음식점에서 메뉴를 주문할 때에도 문장 없이 하나, 둘 숫자만 말하거나 손가락으로 대신한다. 영어라도 계속 뱉다 보면 의사 전달이 쉬워질 수 있지만 상대방이 영어를 못하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당연히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이 나라의 언어를 무소유한 나는 소리를 지우고 몸짓과 눈짓으로 말한다. 


나와 남편이 영어로 대화하다 보니 둘 다 외국인인 줄 알고 긴장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들은 수줍게 우리를 바라보다가 남편이 튀르키예 사람인 걸 알고 나면 긴장이 풀린 듯 웃으며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묻는다.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어린아이들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면서 같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한다. 우리 사진이 얼마나 오래 아이의 폰에 남아 있을지, 사진을 보며 아이는 어떤 기억을 떠올릴지 상상하며 어색하지만 입꼬리를 힘차게 올린다. 


어른들은 남편을 통역사이자 전달자 삼아서 대화를 열고 잠깐 머무르다 간다. 한국에 여행 다녀온 추억을 떠올리거나 결혼해서 한국으로 간 친척이나 지인을 소개하기도 하고,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무용담을 들려주기도 한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사람들은 가게에 왔던 한국인 손님들까지 기억해 내며 얼기설기 자기네 이야기를 엮어 전한다. 나에게 쏟아내는 이야기들을 빨리 알아듣고 싶지만 바로 알 수 없다.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언어가 내겐 그저 소리일 뿐이지만, 마음만이라도 말하는 속도에 맞추고 싶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남편이 통역해 주고 나서야 한걸음 늦게 이야기들이 나에게도 도착한다. 나는 한 박자 늦게, 세세한 내용들이 흩어졌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들으며 산다. 



사람들과의 원치 않는 부대낌을 걸러내고 싶을 때면 “투룩체 빌미요룸 Türkçe bilmiyorum (튀르키예어 몰라요)”을 외친다. 어느 나라에서든 외국인들이 자주 쓰는 마법의 문장이다. 이십 대 초반 중국에서 유학할 당시에 유학생들 사이에서 자꾸 따라붙는 사람들을 떼어내는데 “팅동부”라는 문장이 제일 효과적이라고 소문났었다. 팅동부는 중국어로 못 알아 들었다는 의미인 팅부동 听不懂에서 어순을 바꾼 문장이다. 팅부동이라고 제대로 말하면 “뭐야? 중국어 할 줄 아네!”하며 더 끈질기게 말을 걸 수 있으니, 부러 틀리게 말해야 한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나를 귀찮게 따라오는 사람이 없지만 길에서 누군가 끈질기게 말을 걸면 나는 마법의 문장 “투룩체 빌미요룸”을 외운다.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한 사이라 해도 좋아하는 마음을 멈출 수 없는 대상을 만나면 상대방과 더 많이 눈을 마주치고, 웃고 서로를 끌어안고 어루만진다. 나는 통역해 줄 사람이 없으면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시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할머니는 내게 자꾸 말을 걸고 싶다며, 튀르키예어로 말하고 나는 알아듣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치 할머니가 느끼는 답답함이 목소리의 크기 때문인 것처럼 할머니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양 볼을 한 번씩 번갈아 맞대며 껴안는 튀르키예식 인사를 할 때, 굳이 맞대지 않고 시늉만 해도 되는데도 할머니의 따뜻한 볼에 내 볼을 찰싹 갖다 댄다. 할머니는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 냄새까지 모두 가져가버리고 싶으신 듯, 인사를 하면서 내 목덜미에 코를 대고 한껏 숨을 들이쉬신다. 우리는 두 번의 포옹이 부족한 듯 손을 풀지 않고 서로 얼굴을 바라본다. 할머니는 다시 소리를 높여 말하고, 나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아마 나를 사랑한다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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