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공백

그리워 사무치는 탓에 꽃다발을 샀다.

서른세 번째 공백

by 은호

때로는 내가 힘에 부칠 때만 당신을 찾는 것이 죄스러웠다. 만날 수 없는 이를 그리워하는 슬픔으로, 지금의 내 고통을 덜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서.

당신의 이름을, 괴로움을 덜어가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만 같아서.


최근에는 그것은 그것대로 자연스럽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힘이 들 때마다 당신을 부르던 것은 어릴 적부터의 내 습관이었고, 당신이 가장 먼저 건네주던 다정한 위로에 기대고 싶은 마음 역시 줄곧 진심이었으니까. 다만, 지금의 나는 당신이 그리울 적마다

너무 힘들어서 당신이 사무치게 보고 싶을 적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처음은 당신의 기일이었다.

돈이 없는 학생일 적에는 제대로 된 꽃다발 하나도 완성할 수가 없어, 단 한 송이를 양손에 그러쥐었다. 납골당조차 없기에 내 두 주먹 사이로 우뚝 솟은 가냘픈 꽃은 주인을 찾지 못하고 스러졌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착실히 모아가던 대학생 때는 이따금 서너 송이 겨우 들어간 작은 꽃다발을 사들고 갔다. 부러 꽃은 밝고 희망찬 의미를 가진 것들로, 그때마다 눈에 띄는 색을 골랐다. 여전히 꽃다발을 받아갈 이는 없었지만, 당신을 생각하며 고른 꽃다발을 들고 기차에 오를 때면 어쩐지 당신이 기뻐해줄 것 같았다.

대학원생이 되어서는 처음으로 한아름 커다란 꽃다발을 샀다. 다만, 화려한 꽃다발을 사고 싶지 않았다. 흰, 카네이션이 가득 핀 꽃다발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물었다. ‘흰 카네이션도 있나요?’ 사장님이 의아한 듯이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저, 당신에게 카네이션을 선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저, 당신의 가슴께에 카네이션을 달아준 것이 너무 오래된 듯해서.

사장님은 단정하고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주셨다. 손으로 들기에 버거워, 품에 안고 기차에 탔다. 엄마는 꽃다발을 보고 ‘흰 카네이션은 밖에 들고 다니지 마’라고 했다. 이유를 알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 품에 안긴 꽃다발을 한참을 내려다봤다. 당신이 생각났다.


직장인이 되고, 처음으로 당신의 기일에 꽃다발을 준비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 당신의 기일에 나는 처음으로 당신을 찾지 않고 친구들과 휴가를 보내고자 했다. 하지만 오랜 관성은 익숙하지 못한 들뜬 봄내음을 거부하고, 기일과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심하게 요동쳤다. 즐겁게 웃다가도 자꾸 울어버릴 것 같았다. 외딴 타지에서, 그저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다.

결국 당신의 기일이 1시간 남짓 남은 밤, 나는 문을 닫기 직전의 꽃집으로 달려가 흰 카네이션 꽃다발을 사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한참을 울었다. 이유를 알았지만,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10년이 넘게 지났다. 당신을 잃고 교복을 입은 채 하염없이 울던 나는 어느덧 직장에 다니는 어른이 되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는, 여전히, 당신의 기일이 다가올 적마다 당신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봄이 물어다 주는 모든 다정한 것들 속에서 당신을 찾아야만 했다. 이 봄에 나는 깨달았다.


내가 꽃다발을 사는 건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구나.

당신이 너무 그리워서, 그립고 그리워서,

사무치는 마음을 안고 당신을 보러 간 것이었다.

꽃다발을 품으면, 당신과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나는 나를 위로하려고 당신이 가장 보고 싶을 적마다 꽃다발을 샀다. 이 행위 자체가, 나에게는 당신을 만나러 가는 걸음과 같았다. 마음이 일렁였다.



약속을 나가다가

회사에서 점심을 먹다가

문득 꽃집이 보이면, 아무런 날이 아니더라도 작은 꽃다발을 사서 선물했다. 친구에게, 동료들에게.

그냥 날이 좋아서. 네가 생각나서. 힘내라고.

이유는 다양했다. 하지만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얼마 전에는 또다시 너무 힘들어서, 흰 카네이션 꽃다발을 샀다. 함께 있던 친구들이 마음이 조금 괜찮아졌어? 물었다. 꽃다발을 내려다보면, 다정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


이젠 알 것 같아.

내게 꽃다발은, 마음을 담아 건네는 편지지와 같았다.

위로와 격려, 응원, 다독임, 화해, 축하, 애정….

다만 편지의 내용은 꽃을 받은 이들이 골라줄 것이다.

나는 그저, 너희가, 내가, 담고 싶은 마음을 꽃향기 속에 전부 털어놨으면 해.

좋은 추억도, 슬픔도, 고마움도, 힘들고 지친 마음도.


편지지를 사서,

당신이 그리울 적마다 흰 펜을 들었다.

물기를 머금은 펜 끝으로 봉오리가 맺힌다.

병 속의 잉크가 마를 즘이면,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를 고이 접어서 당신에게 날려 보낸다.

다정이 되었으면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