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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창 응봉 최중원 Sep 21. 2019

사랑을 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된 이 두 문장 사이를 채워보려는 시도


1.

약간 색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이, 어느 밤에 둘 중 한 명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기에 앞서 오늘은 서로의 판타지에 제약을 걸지 말자고 미리 합의했다. 이런저런 행위와 시도와, 그것들을 되돌리려는 노력의 과정들 중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고 결국 그들은 구급차를 불러야 했다. 그들이 실려나간 방에는 이런저런 흔적들만 남아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2.

토요일. 초등학교의 어느 한 반의 마지막 수업은 음악이었다.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인 노래를 부르게 시켰다. “우리가 만나, 사랑을 했다.” 그런데 바로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고, 초등학생들은 야단법석 책가방을 싸서 썰물처럼 교실을 빠져나갔다. 곧이어 자신의 짐을 챙긴 선생님도 교실 문을 잠그고 나갔다. 그리고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3.

식용유와 계란이 사랑에 빠졌다.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계란은 자신의 일부분을 버리면서까지 식용유와 합체하기를 결심하였고,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서로를 알아가며 그들은 마침내 마요네즈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다가와서 마요네즈를 감자튀김과 함께 먹었다. 그 누군가는 소스와 케첩과 마요네즈를 아주 좋아하는 독일인이어서, 그릇의 바닥까지 싹싹 닦아서 먹어버렸다. 정말 남아있는 마요네즈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었다. 


4.

A와 나는 2년 가까이 동거했다. A는 정말, 은혜를 모르는 존재였다. 나는 A를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썼다. 하지만 A가 나를 위해 해주는 것은, 그저 존재하는 것,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A를 사랑했다. 춥고 난방이 잘 안 되는 겨울의 원룸 방 안에서 A를 안고 자면 얼마나 따듯했던지! 하지만 알러지성 비염이 있었던 나는 천식에 걸리고 말았고, A는 홀연히 나를 떠나 내 후배에게 정착했다. 일 년쯤 뒤인가 후배의 집에 놀러 갔다가 그곳에 머물고 있는 A를 봤을 때, 나는 무척이나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A는 나를 본체만체하고 버릇없이 누워서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A의 머릿속에 이미 나는 없었다. 어쩌면 나는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 속에는 지금 자신과 동거하고 있는 그 후배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A의 머릿속엔  얄밉게도 아무도 없었고, 아무도 없고,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5.

나는 어렸을 때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선물해주셨던 열 명의 병정 인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보병 분대를 충실히 묘사한, 아이가 가지고 놀기에는 디테일이 섬세한 친구들이지요. 누나는 왠지 그 인형들에 모두 여자 이름을 붙여주었었는데, 진희, 수영 같은 한글 이름부터 제니, 스칼렛 같은 서양의 이름까지 제각각이었습니다. 한 손에 쌍안경을 든 분대장이 연희였고, 기관총을 든, 팔뚝이 굵은 사내는 제이미였지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누군가와 만날 때마다 상대방을 그 병정 인형들 중 한 명이라고 상상하는 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그 병정 인형은 밤마다 진열장을 나와 침대 옆 탁자 위 알람 시계 앞에 자신의 무기를 들고 당찬 포즈로 경계를 섰지요. 덕분에 나는 언제나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장난이었지만, 웃기게도 종종 진지하게 여겨질 때도 있었지요.  분대장 연희와 부분대장 스칼렛을 나는 고등학교 때, 소총수 수영과 진희, 유탄발사기 사수 스칼렛을 나는 대학교 때 만났습니다. 사격 솜씨가 뛰어나 지정 사수 역할을 지명받은 수영, 기관총 사수 제이미, 무겁고 큰 통신 장비를 등에 짊어진 통신병 진을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하면서 만났구요. 나머지 두 소총수, 엘리자베스와 페이 린은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나의 이런 사소한 유희를 알았던 사람은 이들 중 두 명, 스칼렛과 수영이었는데, 이 말인즉슨, 스칼렛과 수영만이 내 집에 와서 내 침대맡에 서 있었던 각자의 병정을 보고는, 그 연유에 대해 물어봤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거짓말이나 둘러대기에는 소질이 없어서 지금 당신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구구절절이 다 말해주었지요. 둘 다 아주 즐겁다는 듯 웃었습니다. 하지만 그중 한 명은 사실 기분이 좋지 않았었는지,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인형을 몰래 가져가 버린 것이 아니겠어요. 믿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날 저녁부터 내리 삼 일간 나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내가 상대를 찾아가서는 인형을 돌려달라고 했더니, 왠지 그 사람은 기분이 엄청 상해서는, 그렇게 헤어진 적도 있었지요. 아, 물론 인형은 잘 돌려받았습니다. 저기 침대 옆 탁상 위 주르륵 늘어서 있는 병정들 중 왼쪽 끝에 큰 유탄발사기를 들고 있는 친구가 스칼렛입니다. 보다시피, 나의 병정들은 서로 사이가 돈독하지요. 만나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분대 전체가 저렇게 모여서 함께 경계를 서며 나의 밤을 지켜준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밤은, 만나는 사람이 없을 때가 더 안전하지요. 새벽녘에 어렴풋이 깨어났다가 미동도 하지 않고 경계를 서고 있는 열 명의 든든한 실루엣을 졸린 눈으로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방금의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었을 것인데, 보다시피 내가 이렇습니다. 내 생각을 잘 숨기지 못해요. 그럼에도 이 방을 나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 당신이 선택할 차례이네요.  둘 다 거의 똑같이 생겼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제일 끝에 서 있는 같은 포즈로 소총을 들고 서 있는 두 명이 바로 내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두 명이지요. 당신은 엘리자베스오, 페이 린이오? 잠깐, 화장실에 가고 싶다면 잘못된 문을 고른 것 같습니다. 아, 가셔야겠다고요? 밖은 춥고, 금요일 밤의 거리는 너무 요란스러울 터인데요. 네, 이해합니다. 다 큰 어른이 병정놀이를 하는 것, 좀 유치해 보일 수 있지요. 엘리자베스나 페이 린이라는 이름들도 조금 취향이 올드한 것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리고 싶네요. 그러면 조심히 잘 들어가셔요.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오늘도 병정 열명이 모두 다 같이 경계 근무를 하게 되었군요. 오늘 밤의 내 방에는 나 빼고 아무도 없지만, 덕분에 외롭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전 저녁 점호 시간에, 근무 중에 군가를 부르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야겠습니다. 어젯밤에는 그것 때문에 몇 번이나 깼거든요. 


6.

세상이 멸망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오로지 두 명. 별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그 둘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식을 낳는데 실패하고 늙어 죽었다. 남자에게 문제가 있었는지, 여자에게 문제가 있었는지, 혹은 둘 다인지를 그들은 알 수가 없었다. 클리셰이지만 핵전쟁으로 멸망한 세상이었기에 세상에는 방사선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넘쳐났다. 아마도 둘 다에게 똑같이 인류 멸종의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세상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7.

사랑을 할 때에만 그는 자신이 진짜로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랑은 그에게 대체로 괴로운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하나의 사랑이 끝나면 절박하게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맸다. 사랑의 대상이 자신에게 하는 모든 행동들이, 혹은 그 행동들이 자기에게 끼치는 모든 영향들이 그에게는 삶의 증거였다. 드높은 곳에서 갑자기 깊은 낭떠러지 밑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감정의 큰 진폭은 여러 번 겪는다고 도저히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으나, 파도가 없이 잔잔한 삶이란 그에게는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높은 파도를 찾아다니는 서퍼처럼 여러 번의 사랑을 맞아 보고, 그럼에도 살아남은 그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는 모든 사랑이 비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더 이상 중요한 변수가 되지 않았다.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부딪히며 튀어 오르는 감정들, 순간들, 기쁨들과 갈등들을 언제부턴가 그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 역시도. 그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서 파도를 해쳐 나가고 있었다. 그는 사랑을 하고 있었지만, 그 사랑 속에는 상대방도, 자신도, 아무도 없었다. 


8.
Wer war in irgendetwas verliebt. Und da ist niemand gewesen.


9.

C는 그리고 라는 접속사에 대해서 생각했다. 말을 천천히 하고,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가며 고르는 습관이 있는 그였다. 영어로는 and, 독일어로는 und, 논리적이고 주장이 탄탄한 글을 쓸 때는 사용을 지양해야 하는 접속사이다. 명확한 인과 관계를 설명해주는 “따라서”나 선후관계를 설명해주는 “그 후에” 와 비교해 봤을 때 “그리고”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든지 사용될 수 있고, 따라서 어떤 확실한 의미도 부여해 주지 못한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지난 사랑에 대하여 말할 때 “그리고”라는 접속사 밖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왜 그렇게 흘러갔는지, 그리고 왜 지금은 자신에게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지를 그는 도저히 인과적으로, 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0.
어느 외딴섬의 호텔에, 10명의 서로 일면식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한 사람의 초대를 받고 이 곳으로 모였지만 정작 호텔에서 그 초대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곧 한 명씩, 기이한 방법으로 죽어간다. 마지막 남은 한 명까지 목을 매어 죽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사랑에 관해서 굳이 언급하자면, 죽은 열 명 모두가 인생에 있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사랑을 해봤다는 것 정도로 충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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