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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도리 Apr 19. 2022

싱글몰트고 나발이고, 글렌피딕 병나발

  



다음날은 중요한 시험이 있었다. 스물셋. 그때 나는 갈림길 위에 섰다. 내일의 결과에 따라 인생의 향방이 결정될 터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홀로 비장했다. 학력고사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었다.


일찍 책을 덮고 자리에 누웠다. 긴장감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불길한 상념들이 꼬리를 물었다.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자야 한다고 조바심을 낼수록, 정신은 점점 말똥말똥해졌다. 숙면 없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갈까? 우주의 기운까지 끌어모아야 할 판국에, 이런 식이라면 끌어모으기는 커녕 모아둔 지식조차 우주 속으로 흩어질 형편이었다. 하지만 한번 머리맡에 똬리를 틀고 앉은 불안증은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고전적 방법을 써보기로 한다. 양을 상상하며 숫자를 센다. 넓은 초원이 펼쳐지고, 나무 울타리 앞에 양들이 줄을 섰다. 하나, 둘, 셋. 복슬복슬한 흰 털, 암모나이트를 닮은 나선형 뿔. 잠깐! 왜 만화지? 깡충거리는 양들이 실사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이었다. 흥미로웠다. 생각해보니 나는 살아있는 양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만화나 삽화가 익숙했다. 딱따구리는 우디, 당나귀는 동키!  제멋대로 날뛰는 연상에 잠은 저만치 더 멀어졌다.


동영상은 너무 역동적이야. 차라리 음성파일이 낫겠어.  나는 적합한 소리를 물색했다. 쓸쓸하기로는 가을밤의 빗소리가 으뜸이지. 오죽하면 ‘추야우중’이라는 한시도 있잖아. 또다시 생각이 급류처럼 흐른다. 겨울 백사장의 파도소리도 괜찮아. 어느새 나 홀로 텅 빈 모래밭걷고 있다. 적막한 걸로 치면 숲 속만 한 곳도 없던데... 친구와 들렀던 오대산 암자가 떠올랐다. 깊은 산의 적요를 뚫고 깃털처럼 사뿐하게 내려앉던 처마 밑의 풍경소리.  


서서히 잠이 오는가 싶더니만, 결국 제자리였다. 갑자기 내일의 결전이 떠오른 것이다.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착시화처럼 그 평화로운 소리들이 온통 불길하게 느껴졌다. 세상만사 일체의 것이 마음에 달렸다더니, 빗소리, 파도소리, 바람소리가 문득 비극적 종말을 암시하는 효과음처럼 들렸다. 아아 관두자.


나는 일어나 형광등을 켰다. 잡지에서 읽은 불면증에 대한 글이 생각났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으면, 오히려 잠에 대한 생각을 잊어라.’ 나는 책상에 앉았다. 남들보다 한 글자라도 더 볼 수 있어서 오히려 좋다고, 간사한 모리배처럼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했다.


10초 만에, 도로 책을 덮었다. 눈을 뜨고 있다고 정신도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눈알이 빠지는 것 같고, 집중력은 애저녁에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시간은 아침을 향해 또 한걸음 다가섰다. 입이 바짝 말랐다.


찬물을 마시러 부엌에 나왔던 나는, 찬장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유레카! 언젠가 먼 친척 아저씨가 할아버지께 선물로 들고 온 것이었다. Glenfiddich Single Malt Scotch Whisky. 집에 양주를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소주, 아빠는 막걸리. 나는 주로 맥주였다. 식구들의 냉대와 무관심으로 인해, 저 럭셔리한 유리기둥은 여태껏 백설탕이나 소금 푸대와 함께 찬장 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 이거야. 이거였어. 고슴도치처럼 곤두선 신경들을 누긋하게 잠재울 최고의 무기. 나는 그놈을 품에 안고, 물컵 하나를 챙겨 방으로 들어왔다. 가슴이 벅찼다. 이 독주 한 잔이면 숲 속의 공주같이 단잠에 빠져들었다가, 아침이면 새벽 우유처럼 신선한 뇌세포로 상쾌하게 시험장으로 날아갈 것이다. 기적처럼 나에게 온 녀석이 사랑스러워 나는 그윽한 눈으로 술병을 바라보았다.


사실 위스키랑은 친하지 않았다. 한두 번 맛 본 적은 있지만, 취할 정도로 마신 기억은 없었다. 맛도 맛이려니와 ‘나, 지금 여기를 지나는 중이야’ 목줄기를 타고 자신의 이동경로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그 타들어가는 촉감이 사람을 주눅들게 했다. 게다가 알코올 함량이 40°라니! 그것의 1/10밖에 안 되는 맥주를 마시고도 매번 정신이 알딸딸한데, 열 배 농축액을 한방에 털어 넣으면... 감히 결과를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나에게 위스키는 술이라기보다 일종의 화학물질이나 약품에 가까웠다. (위스키로 매스를 소독하고 응급수술을 하는 영화 속 익숙한 클리셰는 나의 이런 선입견을 강화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오늘 밤 내 처지도 어떤 면에서는 응급에 해당되었다. 수술이 급한 환자에게 위스키가 알코올 솜을 대신하듯, 잠이 급한 나에게 글렌피딕이 급성 수면제 노릇을 해줄 것이다. 막막한 상황 속에서 이런 묘수를 생각해낸 것이 대견해서 나는 내 머리통을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금단의 문을, 아니 금단의 뚜껑을 땄다.


전략부터 수립했다. 솔솔 잠이 올 정도로만 마시는 거다. 맥주로 치면, 500cc.  위스키의 도수는 대략 맥주의 열 배니까, 결국 양주 50cc를 마시면 적정량이다. 똑부러지는 계산을 마치고 나서, 나는 유리컵에 위스키 50cc를 따른다. 아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스트레이트 잔도 아니고, 커다란 물컵을 앞에 놓고 보니, 50cc는 웬지 병아리 오줌처럼 느껴졌다.


나는 대범하게 반 컵을 따랐다. 국그릇으로 소주를 마시던 외할아버지의 용맹함이 떠올랐다. 나는 그의 직계혈통이 아닌가. 원샷. 홀짝거리기에는 이미 밤이 깊었다.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하고, 서둘러 자야 한다.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흐른다. 거의 다 왔다. 이제 이완된 몸에 잔물결처럼 찰박찰박 잠이 밀려올 것이다.


병뚜껑을 닫고 자리에 누웠는데, 이상하게 아무 느낌이 없었다. 알딸딸하지도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맥주로 환산하면 거의 피처 잔을 들이킨 셈인데 웬일일까? 스카치 위스키를 마셔서 그런지, 갑자기 영국 사람 셜록이 빙의한다. 단순히 알코올 총량만으로 따질 수 없는 다른 변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맥주는 한 잔만 마셔도 어지럽다던 희영은, 소주는 꼴짝꼴짝 잘도 마셨다. 자기는 소주 체질이라면서.

이거였다. 사람은 시험관이나 비커가 아니라, 물리화학적 세계를 초월하는 불가사의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위스키 체질인가? 23년만에 발견한 내 고급진 음주 취향에 놀라 나는 다시 흐뭇하게 잔을 채웠다.


안주는 없었다. 애당초 술을 마시려던 게 아니었으니까. 이건 술이 아니라 불면증 치료제! 아니아니 불면증이 아니라 불안증인가? 까칠했던 뉴런들이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서서히 말의 경계도, 마음의 경계도 허물어졌다. 시험이 뭐라고. 그깟 시험 따위가 뭐라고! 문득 나 자신이 한심했다. 쯧쯧쯧. 소리 내어 혀를 차다가 이번에는 내가 낸 소리에 흠칫 놀랐다. 코메디가 따로 없었다. 제 소리에 놀란 내 모습을 상상하니 자꾸만 키득키득 웃음이 터졌다.

 

어라? 잔이 비었네? 다시 한 잔 더. 이제는 손도 떨리지 않았다.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촌스럽게 뭘 그렇게 원하는 게 많아? 뭐가 또 그렇게 급해? 욕망과 조바심이 바둑판의 흑백돌처럼 번갈아가며 영혼을 두들기던 그 시간들이 견딜 수 없이 속악스러웠다. 초점이 흐려진다. 초록색 병 위에서 알파벳이 춤을 춘다. Single Malt Whisky. 이건 싱글을 위한 술이라는 뜻인가? 내가 외로운 싱글인 건 어떻게 알았대? 어느새 잔도 필요 없었다. 나는 병을 들고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혼술 주제에 뭘 일일이 따라 마시나. 첨잔도 귀찮다.  


병나발을 부니 어쩐지 불량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것이  산적의 두령이라도 된 듯 호연지기가 솟구쳤다. 막걸리를 들이키듯,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위스키를 삼켰다. 날카로운 향기가 입안을 떠돈다. 마침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목 안에 털어 넣고서, 나는 침대에 털썩 쓰러져 버렸다. 어디선가 하얀 양 떼가 나타나더니 천장에서 빙글빙글 강강술래를 했다. 양 때문에, 양 떼 때문에 너무 어지러웠다. 온 세상이 잠든 새벽 3시. 밖에서 빗소리가 들린다. 아니 파도 소리가, 댕그랑댕그랑 풍경소리가 밀려온다.    

  

모로 돌아 눕는다. 책상 위에 방금 내가 비운 글렌피딕 초록병이 보였다.

술병 위에서 장엄한 뿔을 드리운 수사슴 한 마리가 깊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사슴이 자꾸 나에게 뭐라고  말을 다.

빗소리 때문에, 파도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최선을 다해 몸과 귀를 열었다.


마침내 저 머나먼 스코틀랜드 계곡에서 뛰어놀던 그놈의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 넌 이제 X됐다.                



* 이미지 - Alibab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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