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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verly Story Sep 25. 2024

#4 한혜연 _1

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어떻게 만났는지 다 기억나지~ 우리가 너 원나잇한 거 알았으면 브런치 모임 오라고 연락 안 했을 텐데. 그날따라 텔레파시가 불통이었어 그치잉? “


혜연이 텔레파시 보내는 흉내를 냈다. 


”우리 첫날은 안 잤어! 아니 같은 호텔방에서 잔 건 맞지만 그 원나잇이 아니었다고. “

”나이가 몇 개인데 그게 가능해? 더구나 자유분방한 미쿡인인데?“

”진짜라니까! 미국인은 다 자고 다니냐. 것두 편견이야. “


둘의 옥신각신 대화에 세희가 끼어들었다. 


”미국으로 떠난 후부터 창민씨가 지극정성이었지. 장거리 연애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닌데 창민씨 정성이면 장거리 연애 10년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


세희가 그들의 장거리 연애를 칭송했다.


”아직 사귀지도 않고, 썸타자 마자 생이별했는데, 그 사람 정말 노력했었지. 수민이 아플 때 미국에서 죽이랑 꽃 배달 보냈던 거 생각나? 현시대 테크놀로지 기술과 우리나라 배달의 기사님들 팀워크로 이뤄낸 사랑이지. “


지아도 한마디 거들었다.


” 응 완전 자상해. 그때 기억나? 나 김치랑 밑반찬 만들어서 수민이 집에 넣어주러 갔는데, 세상에 어떤 남자가 집 앞 계단에 서 있지 뭐야. 딱 알아봤지 사진 속 그 남자. 실제로 얼마나 훈남이던지. 내가 다 떨렸다야. “ 

”그때 서프라이징이었지? “

” 응 내가 문을 열며 수민이 집으로 들어가자 해도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극구 사양하고, 수민이 올 때까지 계단에서 기다렸던 거 같아. “


수민은 그날을 떠올렸다. 커다란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계단에 앉아 있던 그 남자는 수민을 보자 환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다가오던 그 모습이 수민에게 현실성이 떨어졌다. 지금 뉴욕에 있어야 할 사람이 도대체 왜 눈앞에 있는지. 전 세계를 누리며 일하는 사람이다 보니 정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듯했다. 더구나 수민의 집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이틀을 함께 보낸 후 그가 싱가포르로 떠난 지 약 한 달 만이었다.

그동안 창민은 싱가폴과 미국에서의 바쁜 일정에 자주 연락하지 못했다. 업무상 한 두 번 통화한 게 다였다. 그는 아직 H사와 협업하는 중이었지만 사실 수민과의 프로젝트는 마쳤던 상태였다. 업무 핑계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 


서로 매일 문자를 적었다가 보내지 못했다. 각 국의 시차도 있었고,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 얼만큼의 친밀도로 문자를 보내야 할지 머뭇거렸다. 마지막 날 둘만의 은밀한 시간도 매일 떠오를 만큼 행복했지만 관계 정리도 못하고 헤어졌다. 그래서 각자 직장동료인지 썸 타는 관계인지, 그냥 지나가는 관계일지도 몰랐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의 뜸한 연락에 수민이 실망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막상 연락되면 무척 다정했다. 평소에 문자조차 없고 설사 보낸다 해도 한 두 단어 정도만 보내는 모습도 서운해서 창민을 마음속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계속 신경 쓰였다. 그렇다고 그를 만나러 뉴욕으로 가겠다는 둥, 사랑의 불나방처럼 마구 불에 뛰어들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그녀도 사회적 위치가 있었다. 답답했지만 수민은 그냥 있었다. 그냥 없던 일도 만들어 회사일에 집중했다. 역시 일이 내 연인이다. 나이가 들면 그냥 있는 게 답이라고 수민은 여겼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른 후 수민의 집 앞 계단에 창민이 앉아 있었다. 수민을 보자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랜 시간 기다려 다리에 쥐가 났는지 살짝 절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수민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수민은 최근 야근하느라 푸석해진 피부와 얼굴의 잔주름이 거슬리던 중이었는데, 그가 갑자기 나타나 그렇게 바라보니 민망해졌다. 보톡스라도 미리 맞아둘걸.


” 여전히 이쁘네. “


한 달 만에 나타나 영어 발음 섞인 한국말로 그가 뱉은 한마디였다. 거짓말이라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좋다. 아니 나이가 들은 후에 들으면 더 기분이 좋다. 자주 듣지 못하는 말이기에. 오늘따라 집 앞 가로등 노란 불빛 조명이 감사했다.  


”못 참아서 왔어요. 보고 싶었어요. “


 창민은 그날 그렇게 수민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5. 한혜연


”언니, 이번 출장썰 좀 풀어봐. 이번 협업에 썰리도 있었어? “

”걘 나이도 어린데 왜 그럴까 “

”........ “


<맛키> 모임 시작부터 에너지 충만했던 혜연이 썰리 이야기가 나오자 조용해졌다.


썰리는 국내 유명 인플루언서 중 한 명이다. 썰리는 패션 뷰티 인플루언서로 본명은 이연이다. 혜연보다 열 살이나 어리지만 두 사람은 성격도 취미도 잘 맞아 친하게 지냈다. 유명해지기 전부터 패션쇼나 파티에서 자주 만나다 보니 두 사람은 친해졌고, 가끔 콘텐츠 협업도 하며 언니, 동생으로 둘은 친했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자유로운 영혼인 혜연이었다. 그녀는 강남에 유복한 부모를 둔 외동딸로 부족함 없이 자랐고 현대 무용을 전공했다. 키도 크고, 이목구비 뚜렷한 미녀로 수수한 옷을 입어도 화려한 스타일로 소화하고 성격은 털털한 편이라 그녀를 따르는 친구, 동생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인플루언서가 되기 전부터 이미 업계에 유명세를 탔고, 패션쇼나 각종 파티에 초대받던 혜연이었다.   


외동으로 자란 덕에 ’ 혼자를 즐기는 법'을 안다. 혼자 쇼핑하고, 식당에 가서 후루룩 국밥을 먹기도 했다. 혼자 콘서트 공연을 가기도 하고, 가끔 여행도 혼자 훌쩍 떠나기도 했다.


부모님 성화에 결혼을 했지만, 다행히 ‘혼자’의 삶을 존중하는 비슷한 남편을 만났고, 함께 살지만 룸메이트처럼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은 채 애정없이 무덤덤하게 살아갔다. 두 사람 사이 외동아들, 율을 두고 있었다.

모험을 좋아하는 율을 데리고 혜연은 홍길동처럼 불쑥불쑥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모자간의 사이도 좋았다.  


문제가 없어 문제인 부부라 할 정도로 부부는 조용히 각자 할 일을 하며 잘 살았고, 혜연의 삶은 이제껏처럼 편히 잘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혜연은 혼자가 지독하게 싫었다. 


어렸을 때는 동생을 낳아달라고 울고 불며 엄마를 조르기도 했다. 부모님이 외출을 하고 베이비시터와 함께 있던 시간은 더 외로웠다. 진심으로 혜연을 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그녀 부모님을 의식해서 가식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던 어린 혜연이었다. 그렇게 켜켜이 쌓여온 외로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어린 혜연은 마음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냥 뭐든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그냥 웃고, 그냥 대화하고, 그냥...그냥 지냈다. 

아무도 외로워하던 어린 헤연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마음의 문을 닫고 철저히 혼자가 되기로 작정한 그녀가 영혼없이 웃고 대화하고, 의욕없이 '그냥' 지내는 모습을 염려하는 이는 없었다. 부모님조차도. 늘 바빴기에 그들 눈에 문제없이 그냥 지내는 혜연의 모습이 어쩌면 다행이라 여겼을지 모른다.  


외로운 혼자만의 시간에는 책을 읽고, 카메라를 가지고 놀았다. 혼자 셀카놀이를 하거나 베이비시터의 뒷모습을 찍었다. 창문 밖 지나가는 사람을 찍거나, 마당에 누워 멀건 하늘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성인이 된 후부터는 가방에 책을 쑤셔 넣고, 카메라 장비를 챙겨 떠나는 나 홀로 여행을 시작했다.


혼자가 싫지만, 언제부터인지 혼자가 편해진 혜연. 


사진촬영이 취미였던 덕에 아들 율과 함께 떠났던 여행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다 보니 사람들이 혜연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녀의 패션 스타일과 사진 속에 펼쳐진 여행지, 더불어 아들 율의 스타일까지 화자 되었다. 사람들은 혜연과 율이 입었던 옷들을 찾아 구매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돈 많은 이쁜 언니’,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미녀 언니’란 칭호를 들으며 점점 인기를 얻었다. 정말 어쩌다 보니 유명인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그냥 살다가, 어쩌다 유명인이 될 수 있는 확률은 크지 않다. 

혜연은 이런 삶의 변화가 당황스러웠지만, 싫지 않았다.  이것도 잠시겠지. 


그런데, 혜연의 인기가 올라갈 무렵 DM이 왔다. 유튜브 권유를 위한 이 PD의 제안서였다.

문제가 없는 게 문제였던, 그냥 그냥 흘러가던 무미건조하고 외롭던 인생에 흥미를 일으켰던 제안이었다. 


그때도 혜연은 <맛키> 모임에서 친구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부모도 아닌 바로 그곳에 모인 세 여인이었다. 


평소 혜연은 패션 스타일과 뷰티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리뷰 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패션 뷰티 하울 채널을 운영하며 혜연은 자신의 적성을 찾은 듯 소셜미디어 콘텐츠 제작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녀의 세련된 스타일과 입담에 3040대 여성들 뿐 아니라 남성들과 20대 여성들까지 팬층이 확장되었다.


모처럼 혜연은 설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카메라, 패션, 여행,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여서 말이다.  


친한 언니동생 사이로 지내던 썰리도 패션 뷰티 인플루언서였다. 올해 서른 살이 되는 썰리는 살짝 통통하지만, 어려 보이는 동안과 귀여움으로 인기를 얻었다. 가끔씩 패션쇼나 큰 이벤트 파티에서 혜연을 보면 그녀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었다. 물론 혜연의 타고난 미모와 패션 감각은 어쩔 수 없지만, 그녀와 함께 있다면 썰리는 마치 동급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썰리는 혜연과 친해지고 싶어 애교 부리며 언니라 부르고, 그녀를 잘 따랐던 동생이자 동료였다. 혜연은 살갑게 구는 열 살 어린 썰리가 귀여웠다. 어릴 적 동생을 낳아달라고 엄마에게 떼쓰며 울던 때를 떠올리며 썰리를 동생처럼 이뻐했다.   


한편, 혜연의 인기는 갈수록 올라가고, 꽤 이름이 알려진 인플루언서급이 되었다. 혜연의 유튜브 채널과 각 소셜미디어 팔로우 수는 꾸준히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티브이 출연 문의도 들어올 만큼 인지도가 올랐다.

연예인 버금가는 품위와 우아함, 거기에 세련미까지 갖춘 혜연에게 특히 고급브랜드들이 협찬하기 시작했다. 


도도해도 이상할 거 없어 보이는 외모로 때로는 옆집 언니처럼 호탕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팬들과 소통하는 혜연이었다. 친구처럼 시청자와 소통하는 인플루언서의 모습이 티브이 속 연예인과 다른 점이기도 했다. 

혜연은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잘 알았다. 그 일을 위해 무엇을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얼굴과 모습을 보이며 인기를 끌고 있던 참이었다. 


2023년 10월 어느날, 뉴욕과 런던 2024 S/S 패션위크가 끝난 지 얼마 후였다. 

혜연은 몇몇 고급브랜드 패션쇼에 초대받아 패션위크동안 뉴욕과 런던을 방문했다. 물론 공항에서부터 이PD와 함께 V 로그를 제작했고, 패션쇼 현장과 귀국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모든 일상을 콘텐츠화시켜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그녀는 귀국 후 한동안  패션쇼 참가 소감과 내년 상반기 패션 트렌디를 시청자들에게 알려주었고, 이번 뉴욕 런던 방문 때 내돈내산 의상을 소개했다. 더불어 지난 며칠 크고 작은 뷰티 브랜드에서 협찬받은 뷰티 관련 신제품을 리뷰한 후였다. 


런던에서 귀국 후 빡빡한 녹화 일정을 소화한 후라 좀 더 쉬고 싶었지만,  그 날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했다. 어느새 쌀쌀해진 10월 날씨에 뉴욕 출장 중 구입했던 신상 외투를 여미며 혜연은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굿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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