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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딘이 Jun 02. 2024

시험관이 이렇게 힘든 줄 알았더라면(1)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호르몬 주사의 기억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는 35년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팠던 경험에 대한 회고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험관 시술을 결정하다


인공수정에 한 차례 실패하고, 바로 시험관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사실 시험관이 힘들다는 이야기는 건너서 많이 듣기는 했다. 그래서 너무 쉽게 결정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후기들을 보면 일과 병행할 수 있는 수준은 되는 것 같아 힘들어봤자 얼마나 힘들겠어 하는 마음이 컸다. 그저 몸이 조금 더 피곤해지는 정도 쯤으로 생각했다. 당시 회사에서도 팀을 옮긴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느라 바빠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저 병원에 열심히 다니면서 시키는대로 주사맞고, 약 맞고만 잘해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안일한 태도였다.  


게다가 운 좋게도 시험관을 시작하려던 시기에 마침 오랫동안 임신을 준비하던 친구가 시험관 1차에 별탈없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그 친구에게 물어봤던 시험관 시술에 대한 경험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몸이 약간 피곤한 정도. 야근이 많은 직장에 다니고 있는 친구였기 때문에 저녁에 주사를 맞을 때마다 시간을 제대로 맞추기가 어려워서 그게 조금 번거로운 정도라고 했다. 실제로 경험해본 친구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정말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마다 반응이 다 다를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그리고 시험관이 확률이 훨씬 높다고 했던 병원의 말에 솔깃한 것도 있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임신에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에 인공수정이라는 적은 확률을 믿고 병원을 자주 들락날락 하느니 조금이라도 젊을 때, 조금은 고통스럽더라도 시험관을 빨리 시도해서 임신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어차피 주사를 맞을 거라면 처음에 조금 양을 늘려서라도 한 번에 짧고 굵게 하고 끝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고통을 견뎌낼 충분한 각오 없이 시험관 시술이 시작됐다


그렇게 별 생각없던 시험관 시술이 시작됐다. 인공수정 때와는 다르게 먹어야할 약들이 많이 늘어났다.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항생제를 비롯해 각종 영양제를 먹어야했다. 시험관 시술이 힘들어질거라 체력을 보충하기 위한 측면이 컸다. 인공수정을 준비할 떄는 엽산과 비타민D 정도만 먹었는데 코엔자임큐텐이나 아르기닌, 오메가3까지 늘어났다. 아침마다 거의 한 움큼이나 되는 약들을 꾸역꾸역 삼키면서 '이게 진짜 맞는 것인가,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살짝 들기도 했다.


그보다 약 복용보다 더 힘들었던 건 배주사였다. 배꼽보다 3cm 정도 아래에 환자가 직접 주사할 수 있는 배주사. 인공수정을 준비하던 당시 딱 한 번 남편이 놔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처음 주사를 놓는 거라 아플 것 같아서 무척이나 호들갑을 떨면서 맞았었다. 그런데 시험관을 준비하면서는 이걸 2주 동안 매일 매일, 그것도 심지어 하루에 2~3개씩 놔야만 했다. 단순히 주사의 양만 늘어난 게 아니었다. 시험관 주사는 약물이 들어갈 때 아픔의 강도도 인공수정 때보다 훨씬 높았다. 약물이 퍼질 때 배에서 점점 퍼지는 딱딱하고 쓰라린 느낌. 덕분에 우리 부부는 매일 저녁에 만나 웃고 떠들다가도 주사 맞을 시간이 되면 말 그대로 '쌩쑈'를 벌여야 했다.


그런데 주사를 맞는 것보다도 더 힘들었던 건 주사가 들어간 후 내 몸 상태였다. 매일매일 강도 높은 주사를 맞고 난 뒤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일요일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너무 힘들었다. 왜 이러지? 그때까지는 주사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일주일간 주사를 맞았지만 몸에 붓기가 심해지는 걸 제외하면 평소와 비슷한 컨디션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주말 아침이 되면 일찍 일어나서 집 근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개인적인 공부를 하는 게 루틴처럼 돼 있었다. 일요일 아침에도 몸이 조금 힘든 느낌은 들었지만 별 생각 없이 일어나 씻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서 공부한 지 한 두시간 쯤 지났을 때였나. 갑자기 오한이 느껴지면서 몸이 덜덜 떨려왔다. 따뜻한 봄 날씨였는데 식은땀까지 나기 시작했다. 상태가 안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빠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시험관 주사로 내 인생에 다시 없을 것 같은 고통을 겪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한과 두통이 극심해졌다. 점심에 먹었던 것을 전부 게워내고, 침대에 누워 꼼짝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심한 두통은 내 인생에서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었다. 말 한 마디를 내뱉는 것조차 어려웠다. 말을 하느라 목을 사용하고 얼굴 근육을 사용하면 그만큼 골이 심하게 울리는 느낌이었다. 남편이 괜찮냐고 물어보는 말에 가볍게 고갯짓을 하는 것조차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누워있는데 다음에는 근육통이 왔다. 온 몸이 누군가에게 심하게 맞은 것처럼 욱신거리고 아팠다. 몇 년 전에 오른쪽 다리 근육을 다쳤다가 회복한 적이 있는데, 그 쪽 다리가 갑자기 다시 심하게 저려오면서 아팠다. 다리가 아파서 제대로 누워있을 수도 없고,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일요일이라 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옆에서 내 상태를 지켜보는 남편은 응급실에 가야하나 어쩌나 하면서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말에 응급실에 가봤자 호르몬 주사 때문에라고 하면 받을 수 있는 처방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저 꾹 참고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난임병원에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 되자 조금 상태가 진정됐지만 여전히 두통은 심했다. 속으로는 내내 다음날 아침 병원 문을 열자마자 찾아가서 의사 선생님에게 이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험관이고 뭐고 다 취소해달라고. 너무 아파서 사람이 다 죽겠다고.


그동안 일주일 넘게 먹은 약들이나 맞은 주사들이 아까워서 버틴다는 건 내 선택지에는 없었다. 당시 나는 그냥 이 아픔을 빠르게 멈출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예전의 나는 아픔도 잘 참고, 아무리 아프고 힘든 상황에서도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파본 적이 없어서, 내가 그렇게 약한 사람인 줄 몰랐던 사람일 뿐이었다. 시험관 주사 앞에서 나는 무너져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주사의 양을 줄이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나는 남편과 회사에 연차를 쓰고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항상 혼자 병원에 다녔고 남편까지 동행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도저히 안되겠어서 남편에게 SOS를 쳤다. 남편도 힘들어하는 내 모습에 바쁜 상황 속에서도 아무 말 없이 연차를 내고 따라와줬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에게 너무 아프니 약을 중단을 하거나 주사를 바꿔달라고 했다. 선생님은 최근에 추가된 어떤 주사가 두통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 주사를 끊는 것으로 변경해주셨다. 그리고 주사의 양도 줄어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장 모든 걸 다 엎어버리겠다던 생각이 들었던 나도, 아침이 되고 조금 안정을 되찾고 나서는부터는 '이제 괜찮아질 지 한 번 지켜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믿고 한 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리고는 또 저녁이 되자 부부가 쌩쑈를 되풀이하면서 주사를 맞았다. 다행히 이번 주사부터는 그렇게 쎄지 않았는지 맞을 만 했고 두통이나 다른 증상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남아있는 주사들을 모두 맞고, 이제 채취의 날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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