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과 출산이라는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긴 여정이 시작됐다
결혼을 늦게 했다. 만 35세에 결혼식을 올렸으니까 또래들에 비해 꽤 늦은 축에 속했다. 서른살이 넘어가면서 결혼하지 않고 평생 같이 놀아줄 것만 같았던 친구들 대다수가 하나 둘씩 짝을 찾아갔다. 남아있는 소수의 친구들은 굳건한 비혼주의자로서 그들 나름의 자유로운 삶과 연애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끼어 결혼은 해야할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이랑 결혼해야할지 확신이 없었던 나는 그 상태로 30대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 혼돈과 불안 속에 있던 나를 구제해준 것이 지금의 남편이었다. 그를 만나고 서른 다섯의 나이, 30대의 절반을 꽉 채운 시점에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됐다. 결혼하고부터는 삶의 대부분이 좋았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나와 독립적인 생활을 처음 경험해보면서 느끼는 해방감과 자유로움, 퇴근 후 항상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랑하는 연인까지. 평소 기대하고 꿈꿔왔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흔히 꿈꾸는 평범한 결혼생활이라는 그림 그대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었다. 다만 딱 한 가지, 우리 둘을 쏙 빼닮은 아이가 아직 없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남부러울 것 없는 우리 부부에게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아기였다. 둘 다 나이가 30대 후반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조금이라도 덜 힘들 때 아기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 2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물론 당시에는 상대방이 딩크냐 아니냐 정도만 체크하는 수준이었긴 했지만. 우리 사랑의 증표로 서로를 꼭 닮은 아기를 하나 가지면 좋겠다는 건 문과생인 나의 로망이었고, "종족 번식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기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이과생 남편의 의견이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일단 결혼을 했으니 다음 수순으로 아기를 갖고 싶다는 건 우리 둘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래, 아기를 가져야해.
임신 준비를 위한 첫 번째 스텝은 바로 산부인과에 가서 검진을 받아보는 거였다. 둘 다 임신에 문제가 없는 건강상태를 갖고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검사 결과, 다른 부분은 큰 이상이 없었지만 문제는 내 난소 나이였다. 실제 내 나이보다도 몇 년이나 높게 나온 것이다. 검사 결과지를 받고서는 한동안 머리가 멍해지면서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스친 생각은 '이걸 남편한테 어떻게 이야기하지?'라는 걱정이었다.
돌이켜보면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 남편에게 부채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여자는 남자와 달리 임신이 가능한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쉰이 훌쩍 넘어서도 아이를 가질 수 있지만, 여자에게는 완경이라는 불공평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부족한 나를 반려자로 선택해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그에게 2세라는 기쁨을 선물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앞섰다. 게다가 내 나이 서른 다섯. 의학적인 기준에 따르면 만 35세가 넘어가는 여성은 임신이 무척 어려운, 그리고 설령 임신이 되더라도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고위험군 임산부'로 분류된다. 딱 내 나이인 것이다.
나름 건강한 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했던 사람인데, 난소 나이에 무너져버리다니. 원인을 물어봤지만 의사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섞여있을거라 딱 한가지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흡연은 해본 적도 없고, 술은 가끔 마셔도 커피나 탄산은 입에도 안대고 살아왔다. 게다가 최소 주 2~3회 정도는 땀 흘리는 운동도 꾸준히 하면서 좋은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다 난소 나이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희망이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금방 아기 천사가 찾아올 줄 알았다. 무엇보다도 남들 다 하는 임신이니까.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본 우리 엄마만 봐도 그랬다. 나를 포함해 자식 넷을 낳은 우리 엄마는 저출산이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른 이 시대로 치면 '다산의 여왕'이었다. 말 그대로 순풍 순풍 자식들을 낳았다. 엄마 배가 불러왔던 모습을 3번이나 지켜보며 자라왔던 나로서는 임신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심지어 우리집 막내는 엄마가 마흔 넘어 가진 자식이었기에, 그러니까 나도 엄마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딸이니까 임신은 금방 될 줄 알았다. 이렇게 힘든 기다림과 고통, 눈물의 세월이 내 눈앞에 펼쳐질 거라고는 예상조차 못한 채.
더 늦게 전에 적극적인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았다. 원래 결심이 확고해지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타입인지라 병원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는지 집 근처에 새로 생긴 난임병원이 있어 곧바로 예약을 잡았다. 병원에서는 일단 검사부터 받아보자고 했다.
검사 결과, 나는 나팔관 한 쪽이 막혀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어쩐지 나팔관 조영술을 받을 때 아랫배에 유독 통증이 심하더라니. 그 외에는 예상했던 것처럼 내 실제 나이보다 많은 난소 나이 정도였다. 오히려 지난번 검사 후 기대를 많이 내려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훨씬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반면에 남편은 본인의 결과를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정자의 활동성이 평균에 비해 조금 낮다고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병원 문을 나서는 남편은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냥 우리끼리 사는 것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며 체념한 듯 이야기했다. 오히려 내가 남편을 다독이며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소식이 찾아올 것이라고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공식적으로 난임 부부로 진단을 받았다. 결혼 연령대가 빠르게 높아져서 난임이 심각한 문제라고는 들었지만 그 당사자가 우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든 이게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었다. 머리는 어질했지만 그래도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