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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Jan 28. 2023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눈 오는 날 소소한 일상

덩치 좋은 고양이 한 마리가 창문 너머 나무 의자에 앉아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햇볕샤워라도 하는 듯 조형물처럼 앉아 있다. 바람이 제법 부는 차가운 겨울날. 하늘은 이내 하얀 눈이라도 흩뿌릴 듯 회색빛이 감돌고 멀리 호수의 물빛도 희끄무레하다. 식탁에는 짭조름한 시래기와 무가 잘 조려진 붕어찜이 식욕을 자극하고 세월의 무게를 잘 견뎌온 그들의 표정은 여유롭고 환하다. 곁에는 우윳빛처럼 뽀얀 살결을 감춘 채 손길을 기다리는 지평 생막걸리병이 새초롬한 얼굴로 앉아있다. 등이 굽은 식당 주인은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틈에 종이컵에 믹스커피 한잔을 마시며 살짝 여유를 부리더니 이내 빈자리에 널브러져 있는 그릇들을 주방으로 옮긴다. 70대가 넘은듯한 주인이 입은 검은색 가죽바지가 시선을 멎게 한다. 어깨는 좁아지고 다리도 가늘어졌지만 여전히 마음만은 50대보다 더 젊은 노파가 아닐까 상상의 나래를 펴보는 시간.


연일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고 있지만 눈이 날리는 날, 사람들의 마음까지 집안에 잡아두기는 쉽지 않다. 이런 날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 추우니까 집에 머물라고 아무리 말려도 나도 모르게 발길은 이미 현관문을 나서고 만다. 비어 있던 자리들은 어느새 삼삼오오 손님들로 채워지고 술잔을 주고받는 손길 덕분에 주인장의 발걸음도 덩달아 바빠진다. 


"내일 점심으로 추위 좀 풀어볼까요". 4인이 일상을 주고받는 단톡방에서 그가 갑자기 번개를 제안했다. 이내 3명이 '콜'을 외치면서 오늘 점심 만남이 이뤄졌다. 불가피하게 동참하지 못한 그녀는 다음부터는 번개 하기 없기라는 말로 아쉬움을 표현했다. 집을 나서는 나에게 딸은 만나면 주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묻는다.

보통 책이야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상을 주고받는다는 대답에 참 재밌고 신기한 모임이라고 말한다. 4인 4색이라고나 할까. 나이도 직업도 다른 4인. 공통점이 있다면 책과 시를 좋아하고 성격이 무던하고 성실하다는 정도. 어떤 날은 필사한 시 한 편을 공유하기도 하고 간혹 멋진 풍경이나 좋은 글들을 나누고 이렇게 가끔 번개로 만나 따듯한 밥과 차로 몸과 마음을 데우기도 한다.


오늘은 여러 일상을 나누다가 문득 친구를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나이가 들수록 편안한 친구를 찾기도 만들기도 어렵다는 것. 심지어 골프 라운딩을 가기 위해 4명 팀 구성 또한 쉽지 않다며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곁에 있다면 정말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면 가끔 이런 만남 또한 좋지 않냐고 말한다. 이에 한 단계 더 나아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누군가와 말로 풀어내는 일은 어려우니 글로 써보는 것도 좋겠다고 제안한다. 여전히 책을 읽는 것은 좋아하지만 쓰는 일은 역부족이라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K는 멤버가 쓴 글에 댓글을 다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며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했던가. 머리는 희끗해져 한 달에 한 번은 염색을 해야 하고 하룻밤이 지날 때마다 주름의 깊이는 움푹해지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춘인 그들. 햄버거와 삼각밥 경험 이야기 말미에는 좋아하는 사람과 햄버거를 먹어보고 싶다며 수줍게 웃고 술 한 모금만 마시면 얼굴이 벌게지는 그녀에게는 술을 마셔보라고 슬쩍 권유하기도 한다. 정말 늙은 것인지 웬만한 소설을 읽어도 감흥이 없다며 아쉬워하기도 하고 주변에 책이나 문학이야기를 주고받을 친구가 없다며 서운해하기도 한다.


막걸리 세병이 비워질 즈음 누군가의 얼굴은 발그레해지고 어느새 창 밖 의자에 앉아있는 고양이는 세 마리로 늘어났다. 체형도 다르고 털색도 다른 그들이 마당을 가로지르며 장난을 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시선도 더불어 바빠진다. 뿌옇게 변해가던 하늘에선 눈발이 날리고 식탁 앞 접시에는 뭉툭한 붕어 가시가 소복하다. 뜨끈한 누룽지까지 한 그릇 비우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느슨한 시간.


 문학관에 들려 뜨거운 커피로 온기를 더하고 글쓰기에 진심인 문학관지기 그녀의 겨울일상을 가슴에 듬뿍 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따라 풀풀 날리는 눈송이가 더 포근하게 스며든다. 게으른 글을 성의껏 읽어주며 응원을 아끼지 않는 그들 덕분에 가슴이 따듯해지는 주말. 여전히 부족한 나날들을 후회하기도 하고 한발 더 나아간 이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올려다보기도 하지만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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