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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하라티 Aug 27. 2023

open relationship에 대한 이해

친구들이 너는 어떻게 자꾸 공백도 없이 사귀는 게 가능하냐? 고 궁금해하면, 그게 바로 나였다.

나로서는 약간의 공백은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만남과 이별의 반복들, 그 반복에서 나의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잊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또는 껍데기를 자꾸 바꾸는 듯한 모양새로 나의 모습을 변형해 왔다.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스타일에 맞게 나는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만나던 사람들의 스타일, 문화권, 직업, 관심사도 정말 겹치는 것 없이 다 달라서, 주변에서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선택에 놀라워했다.


만나는 때의 첫 느낌을 정말 중요시했고, 뭔가 신기하거나 궁금증을 유발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극호감을 가졌고,  그 사람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은 나의 인생에 대한 공부였다. 그러니 나에게 한국 사람, 외국 사람의 의미가 크게 없다고 느껴졌고, 외모는 외모일 뿐, 어떤 외모를 넘어서는 내가 배울 수 있는 점들을 상대방에서 찾기 시작했다.

이는 그때 당시 내가 보내는 시간들의 느낌과도 비슷했다. 당시에 나는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여행을 해야 했고, 정말 인연이 인생의 버스 정거장인 것처럼 이 사람에서 배울 거를 다 배우고, 뭔가 더 이상 내가 배울 것이 없다고 느껴지면 다른 사람으로 갈아탔다.

그래서 슬픔과 공백을 느끼는 시기도 없었다. 어찌 보면, 나에게는 여행의 연속이었으니까.



이 호기심들과 탐구심들은 내가 정작 힘든 점과, 어려워하는 점에 종착했을 때 '달아나기'를 하게 해주는 변명거리가 되었다. 새로움과 호기심, ‘배움’이라는 이름으로 더 큰 성장의 문 앞에서 달아나기만 했다.


일도 그랬다. 힘들다 싶으면, 그만둘 이유를 찾아 떠났고, 여행을 하는 당시에도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서라는 명목으로 떠났다.

그래서, 내 연애, 나를 바라봐주고, 받아주는 사람들 앞에 나의 치부를 드러낸 틈도 없었다. 그런데, 이게 이 호기심과 뭔가를 쫓는, 뭔가를 바라는 듯한 '누군가가 나타나 나에게 새로움을 안겨주겠지'의 느낌에 내가 너무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다.

새로움에 대한 나의 집착은 카르마처럼,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잠깐 내가 타즈매니아 호바트에 있는 호스텔에서 지낼 때, 만났던 사람이다. 처음에는 가볍게, 이 친구의 매력적인 중후한 목소리와, 독립적이고, 요리를 잘하고, 심심찮은 농담과 칭찬에, 그저 내 눈에 모든 게 매력적인 친구여서 끌렸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호주에서 다음 해를 살기 위한 비자, 세컨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으려면 농장 일수를 일정기간 채워야 했고, 부족한 농장 일수를 위해 나는 타즈매니아 북부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그와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서로 연락을 유지했고, 주말에 시간이 나면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하루는 그가 본인이랑 정말 가까웠던 친구가 뉴질랜드에서 호주로 온다 했고, 그녀에게는 호주에서 첫 시작이다 보니, 본인의 가까운 친구이기에 자신이 머물고 있던 호스텔로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그 친구의 가까움이라는 것은 친구지만, 로맨틱한 연인이 아닌 채, 성관계를 맺는 friend with benefit의 가까움이었다.

나는 당시에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이었고, 항시 뭔가를 이해해야 한다, 또는 어떤 사람이든 이해해하고 싶다는 그 사명에 오히려 솔직한 그의 말에 고맙다고 했다. 어차피 그것은 그 사람의 지난 일이니까.

그런데, 사실 망상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과 집념들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는 않았다. 


이 친구가 오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시기즘, 그가 혹시 open relationship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봤다. 구글에 도대체 오픈 릴레이션십은 무엇인지 검색하기 시작했다. 내가 몰랐던 다양한 개념들이 나와, 우선 나도 공부를 해봐야 알 것 같았다.


이는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해 오는 가치, 독점적 연애, 연애를 할 때 한 사람만을 만난다는 것, 즉, 모노가미(Monogamy)와 함께 존재하는 개념으로 비독점적으로 다자간의 연애를 존중한다는 폴리아모리(polyamory)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나만의 조사 이후, 그가 말하던 개념은 이해가 가고, 내 머리로는 존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명확히 하고 싶었던 것은, 누군가에 대해 감정이 생긴다면, 그 상대방에게도 나에게도 모두 대화를 통해,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쌍방 간 동의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를 했고, 그 친구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 이후 떨어져 있는 동안에 나는 많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결정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의지하던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농장일 수를 마친 나는 호바트로 다시, 나의 집과도 같은 호스텔로 돌아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의 차가운 표정과 함께 이별통보였고, 나처럼 장기로 호스텔에 머물며, 오래 알고 지냈던 친구들의 여러 위로와 고백들이 함께 이어졌다.


그가 원했던 것은 책임감 없는, 본인의 욕구를 채우는 관계들이었을 뿐, 당시에 본인이 원하는 감각 그대로, 원하는 대로 관계를 맺었고, 이는 오랫동안 봐왔던 친구들의 증언으로 수두룩했다. 나는 나 혼자 나만의 연애를 하고 있었다.


분명 그가 제의한 관계방식이 맞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결국 open relationship에 대해 나는 잘 어울리지 않았고, 지금도 썩 마음이 끌리지는 않지만, 나는 이 세상에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맺는 방식이 존재함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다.


당시의 나는 괴로워했던 것은 분명했는데, 그 괴로움은 그에게 버림받았다, 그가 나를 상처 주었다, 그가 나를 배신했다, 이런 생각들 보다도 스스로 한 선택에 대한 상처를 받은 느낌이었다. 나의 욕심과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 그저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좋을듯하여, 약해진 나. 

open relationship을 제의한 그와 이별한 것이 아니라, 나의 과거와 이별하기로 했다.


그때즈음이었다. 즉흥적인 타즈매니아 로드트립의 결성, 그리고 이어지는 레인보우에 대한 이야기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아마도 더 운명처럼 다가왔다.

당시에 나는 어떤 집착과 복잡한 나의 머릿속에서 나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 빈 껍데기와 같았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도 몰랐었다.

뭐가 더 괜찮을지 모르겠는, 딜레마적인 순간들이 찾아오자 나는 나의 삶이 이끄는 대로 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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