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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by 뭉클

처음엔 바다 환경 문제를 다룬 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혀 다른 길로 나를 이끌고 간다.

이 책은 과학 저널리즘, 자전적 회고록, 철학적 탐구가 교차하는 독특한 논픽션이다.

한 평론가의 말처럼 '진리에 복종하는 기쁨과 슬픔'이 깃들어 있다.

사회가 정해놓은 질서와 카테고리의 혼돈 속에 던져진 개인의 분투기이기도 하다.


책의 중심에는 19세기 미국의 어류학자, 스탠퍼드대 초대 총장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있다.
그는 평생 수만 점의 어류 표본을 수집하고 분류했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모든 표본이 산산이 부서졌을때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모습을 보인다. 조각난 물고기 하나하나에 다시 이름표를 달며,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다. 단순히 보면 그 집념은 감동적이기도 하다.

그에게서 조선의 정약전을 떠올린다. 흑산도에 귀양 간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남겼다. 다윈의 <종의 기원>보다 45년이나 앞서 어류의 분류 기준을 세운 학자였다.

어떤 의미에서 정약전은 ‘조선의 조던’이라 부를 만하다.

흑산도라는 한자만큼, 깊고 어두운 혼돈 속에서 학문의 의미를 길어 올린 힘만큼은 더 강력했다.

사회가 정한 종교적 질서에서 벗어났다 하여 사회에서 격리되어 버린 정약전은, 흑산도에 와서 학문의 자유를 펼쳤다.

역설적으로 그가 귀양가지 않았다면 자산어보는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물고기는 존재하지않는다>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중반부에서 전혀 다른 얼굴

을 드러낸다. 진화학적으로 물고기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던이 부여한 질서는 애초에 허구였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게다가 그는 우생학을 옹호하며 인간을 서열화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상에 동조한다.

그의 분류학은 질서의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이었다.

좋은 질서조차 누군가를 밀어내는 구조로 작동할 때가 있다.

오래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여행 중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에서 내려오던 길, 푸니쿨라 케이블카를 타려던 순간이었다.

푸니쿨라 안은 앞서 타고 내려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갑자기 내 옆을 가로막은 백인 남자가 탑승 중이던 내 친구를 두 손으로 밀쳐내려고 했다. 나는 서둘러 친구의 팔을 끌어당겼고, 다행히 봉변은 면했지만, 그의 눈빛은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동양 여자쯤은…”

그리고 자기 일행들끼리 비웃음 섞인 농담으로 이죽거리며 우리 쪽을 계속 쳐다보 것이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건 단순한 무례가 아니었다.

피부색과 성별이라는 표지를 근거로 우리를 하위 범주에 두고 서열화하는 질서였다.

물고기의 범주가 허구이듯, 인종의 위계도 허구지만, 그 허구는 현실에서 상처로 작동한다는 걸 체험했다.

이 책이 경고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허구가 믿음이 될 때, 믿음은 폭력이 된다.


어린 시절의 룰루가 아버지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대목이 있다.

“세상은 본래 의미 없으니, 애쓰지 말고 그냥 살아라”

아버지의 일갈 허무주의가? 어느 것에도 의미를 두지 말고 그냥 살아라가 어떤 힘이 되는가.

“물고기에 대해 생각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빛 물고기 한 마리가 내 머릿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모습을 그려본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 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
-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곰출판, p.263.

밀러는 다시 힘을 낸다.

적응과 진화라는 진정한 진보, 다윈의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보며, 혼돈 속에 깃든 장엄함을 발견한다.

민들레 씨앗이 흩어지듯, 우연과 무질서 속에서도 생명은 솟아난다.

그것이 바로 질서보다 더 큰 진실이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 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 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
-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곰출판, p.264.

좋은 과학은, 우리가 편의대로 그어놓은 선을 넘어 존재의 신비를 응시하게 만든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국 이렇게 속삭인다.

혼돈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무너지는 질서 속에서도 삶은 이어진다고.

진정 중요한 것은 완벽한 분류가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타인을 이해하려는 겸손이라고.
잘츠부르크에서의 작은 상처마저 이 책의 메시지를 더욱 깊이 새겨준다.

혼돈은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가 피어나는 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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