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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새들을 바라본다

마우리츠 에셔 <낮과 밤>, 최인훈 <광장>

by 뭉클
마우리츠 에셔의 석판화 〈낮과 밤〉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다.
밝고 어두운 네덜란드의 운하가 양쪽으로 기다랗게 펼쳐져있다.
새들이 날아가고 날아온다.
하얀 새는 낮에서 밤으로,
검은 새는 밤에서 낮으로.
하얀 새들은 빛 속에서 어둠 속으로 날아갈 때 흰빛이 선명해지고 ,
검은 새들은 어둠을 가로질러 밝은 빛으로 나아가며 온전한 제빛깔을 낸다.
날아가면서 둘은 부딪힘 없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줄지어 날아간다. 그리고 빛이 물러나는 자리에서 어둠이 피어나고,
어둠이 물러나는 자리 끝에서 빛이 다시 고개를 든다.
검은 새와 하얀 새는 점점 새가 아닌 무엇으로 바뀌더니 검고 하얀 마름모가 되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자리를 잡는다.

에셔의 화면에는 경계가 있으나 경계가 없다.

자기를 지키며 날아가다가 주위의 빛과 어둠에 더 자기다와 지다가 어느새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그러나 본연의 색을 지키며 주변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다.

사이사이에 평화가 스며든다.

밝은 곳과 어두운 곳, 옳은 편과 그른 편, 이쪽과 저쪽, 찬성과 반대... 그 이분법의 줄타기 위에서

인간은 얼마나 자주 흔들리며 서 있는가.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나의 직장도 예외가 아니다.

평가의 계절이 다가오고, 사람들 사이엔 조심스러운 긴장감이 번진다.

회의실 안에는 각자의 논리와 정의가 가득하다.

나는 그 사이에서 중간을 지켜야 한다.

누구는 “공정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또 누구는 “배려도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둘 다 옳다.

하지만 회의가 길어질수록 그 옳음들이 서로 부딪히며 무겁게 흔들린다.

그럴 때 내 안의 무게추가 좌우로 출렁인다.

이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 저쪽의 눈빛이 스친다.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지만, 어느새 스스로도 방향을 모르겠다.

결국 기준은 세워야 하고, 결정은 내려야 한다.

하지만 손을 들어주는 순간, 그 손끝이 누군가의 마음을 스치며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워진다.

나는 모두가 조금 덜 아프길 바라지만, 그 마음이 오히려 나를 지치게 한다.

공감은 내 장점이자 약점이다.

타인의 사정을 들을수록 내 마음의 무게 추는 더 흔들린다.

그래도 끝내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일,

그게 내가 이 일에서 포기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윤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면, 최인훈의 <광장> 속 이명준이 떠오른다.

그는 남과 북, 두 체제의 극단 사이에서 길을 잃은 인물이었다.

남한은 ‘자유’를 말했고, 북한은 ‘평등’을 외쳤지만, 그 어느 쪽에서도 그는 숨 쉴 수 없었다. 그의 고백은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는 광장에서는 살 수 없었다. 그러나 밀실에서도 숨 쉴 수 없었다.”

이 문장은 단지 이념의 비극이 아니라,

모든 관계 속 인간의 숙명을 말한다.

“우리는 늘 광장과 밀실 사이를 오간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

남과 북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하루하루의 선택 속에서 우리는 늘 판단을 강요받는다.

이명준은 결국 한쪽을 선택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마지막으로 택한 바다는 낮과 밤이 맞닿는 지평선처럼 경계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말 없는 자유를 얻었다.

사람들은 옳은 결정을 내리려 애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는다.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옳은 일보다 상대적으로 선한 일이 훨씬 많다는 것을.

좋은 결정이란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는 선택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모호하게 보일지라도,

내 마음이 납득한다면 이미 충분히 선한 일이다.

<광장>의 또 다른 문장이 있다.

“모든 진리는 반쪽짜리였다.”

진리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빛은 그림자를 끌고 다니고, 어둠은 그 속에서 빛의 틈을 품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조용히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는 일뿐이다.

에셔의 〈낮과 밤〉은 그걸 보여준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풍경, 서로 다른 새들이 충돌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질서. 그건 타협의 장면이 아니라, 조화와 성숙의 장면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판단력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회색의 용기다.

회색은 타협의 색이 아니라 깊이의 색이다.

빛과 어둠의 이야기를 동시에 듣는 색, 이해와 오해가 함께 머무는 자리다.

좋은 결정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 속에서 내 마음의 편을 지키는 일.

그것이 관계 속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단단한 윤리 아닐까.

세상은 늘 판단을 요구한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누구를 믿을 것인가, 왜 침묵하는가.

그러나 때로는 판단하지 않는 결심, 그 자체가 하나의 용기가 된다.

낮과 밤이 이어지는 회색의 하늘 아래서

나는 조용히 내 안의 새들을 바라본다.

그 새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지만, 결국 같은 하늘을 공유한다.

그 하늘은 곧 우리들의 광장을 조화의 무늬로 포장한다.

누구의 편이 아니라 이것도 맞고 저것도 옳은 듯 늘 고민 많은 내 마음의 편으로 남고 싶다.

여전히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면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끝내는 그려지지 않을까 우리가 원하는 그나마 좋은 그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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