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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고?

<논어> , 카프카 <변신>

by 뭉클

지금의 학교로 전입하던 날, 현관 중앙에 걸린 커다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쓸모, 는 이 어가 영 불편했다.

학교의 비전은 아이들을 격려하고 학교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그런데 그 나침반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라니 어쩐지 차가웠다.

실습 온 교생들은 그 문구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다.

SNS에 올리며 장난일지 진심일지 알 수 없을 대화들이 오간다.

“쓸모 있는 교생이 되어볼게요~”

이어지는 댓글들에 와 놀램과 하하 웃음의 이모티콘이 달린다.

행정실의 젊은 차장님의 소감은 더 인상적이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나, 그동안 쓸모없는 사람이었던 거야?”
"언제부터 쓸모 있어지는 거지?

쓸모라는 단어는 어떤 일에도 필요한 사람이라는 으로 받아들이면 얼핏 칭찬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이 지니고 있는 쓸모를 지칭하는 느낌이 강하여, 마치 인간을 유용성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 같아 냉정한 말이다.

쓸모가 곧 가치가 되는 사회라면, 쓸모를 잃은 사람은 어떻게 될까.


공자는 자주 쓸모에 대해 말했다.

“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논어> 위령공편

그릇은 한 가지 용도에만 쓰이다가 금가고 부서져 쓸모가 다하면 버려진다.

군자불기(君子不器)는 인간이 그릇처럼 쓸모에만 갇히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가 말한 쓸모는 단순히 쓰임의 문제 즉 유용함이 아니다.

그의 군자불기는 마치 그릇처럼 군자가 한 가지 용도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상적 인간상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두루 살피고 원만하다는 뜻으로, 작은 것에 연연치 말고, 큰 도를 펼치라는 것이었다.


여고 시절 독일어 선생님께서 려주신 책으로,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처음 접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커다란 벌레로 바뀌어버렸다는 이 소설을 읽고 그때는 그저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접하는 <변신> 은 그때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와닿는다.

너무나 강렬한 첫 문장을 읽어본다.

"어느 날 아침, 잠을 자고 있던 그레고르는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각질로 된 갑옷처럼 딱딱한 등을 밑으로 하고 위를 쳐다보며 누워 있던 그가 머리를 약간 쳐들자,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 자신의 갈색의 배가 보였다. 배 위에는 몇 가닥의 주름이 져 있고, 주름 부분은 움푹 파여 있었다. 그 배의 불룩한 부분에는 이불의 끝자락이 가까스로 걸려 있었으며,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다른 부분에 비해 비참할 정도로 가는 수많은 다리가 그의 눈앞에서 불안스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진정 꿈은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작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람이 사는 평범한 방. 틀림없이 자신의 방이었다. ”
- 카프카, <변신> 중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그레고르 잠자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리고, 더 이상 그 모습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역할을 잃고 사회적으로 거세당한다.

가족들은 그를 보호하기보다 숨기려 하고, 더 나아가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한다.

그는 여전히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아들이, 오빠가 인간이 아니게 된다.

하루아침에 말도 안 되는 딱정벌레 닮은 흉측한 해충이 되어버린 그레고르 잠자만 두고 보면 기괴하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면 모두가 공감되게 현실적이다.

가족을 책임질 수 없게 된 잠자의 고통이 그러하고,

하루아침에 무능해져 버린 가장에 대한 식구들의 일련의 대응들이 그러하다.

그가 벌레로 변한 이후에도,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벌레로 변한 건 어쩌면 그레고르가 아니라 가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한 인간을 ‘쓸모없음’으로 정의하며 외면했다.

그레고르의 변신은 가족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거울이었다.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그레고르 잠자는 결국 죽어간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그레고르가 죽은 다음 날 아침의 풍경으로 끝난다.

“다음날 아침, 그레고르가 죽었다는 것을 안 가족들은 감사의 성호를 긋는다.
그리고 봄날 아침의 부드러운 공기 속으로 나가 전차를 타고 야외로 나간다.
그들은 장래계획을 얘기하며 이제 딸에게 훌륭한 짝을 찾아 줘야겠다고 생각한다. ”
- 카프카, <변신> 중에서

쓸모를 잃은 인간은 버려지고 그 자리는 또 다른 쓸모를 부여한 인간이 대체되는 것으로 소설은 끝맺는다.

인간의 존재가 그렇게 소모품으로 변모할때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가라고 카프카는 묻고 있는 것 같다.


공자의 문장을 다시 보자.

“爲人之學(위인지학) 하지 말고, 爲己之學(위기지학)하라.”
- <논어> 헌문편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닦기 위한 공부를 하라는 뜻이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려는 공부가 타인을 향한 공부라면, 사람다운 인간이 되려는 공부는 자신을 향한 공부다.

공자의 쓸모는 타인의 평가 속에서 얻는 유용함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찰과 덕을 통해 이루는 내면의 성장이었다.

이 말은 카프카의 세계와 정확히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그레고르 잠자가 버려진 이유는 그가 ‘위인지학’의 세계, 즉 타인의 필요 속에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우리에게 자신의 내면에서 쓸모를 다시 정의하라며 '위기지학'을 제시한다.

100년 전의 그 질문과 천년 전의 현자의 답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논의 끝에 우리 학교의 비전은 달라졌다.

“배움과 실천으로 성장하는 어린이 ”

짧은 문장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학교의 공기가 달라졌다.

쓸모 대신 성장, 효율 대신 배움과 실천, 이 새로운 비전은 공자의 爲己之學(위기지학)과 맞닿아있다.

누군가에게 쓰이기 위한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고 실천하며 성장하는 인간.

그것이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쓸모를 평가하는 학교에서,

성장을 격려하는 학교로의 변신.

이 변화 속에서 비로소 교육은 인간을 회복한다.


오늘의 사회는 여전히 쓸모를 요구한다.

직장에서,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인정받기 위해 끝없이 변신한다.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의 가족이 그렇고,

박찬욱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 속 인물들이 그러하다.

세상이 만든 쓸모의 질서 속에서 효용성이 다 되었다고 버려지고 끊임없이 상처받는다.

그러면서 생존과도 같은 본인들의 쓸모를 찾아 선악의 경계도 무너뜨리는 결정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공자는 말했다.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鄰)
- <논어> 이인편

쓸모란 효율이 아니라 관계이고, 성과가 아니라 덕의 실천이어야 한다.

쓸모 있는 사람보다 사람다운 사람이 우선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짜 ‘쓸모’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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