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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을 바라본다는 것

수전손택 <타인의 고통>

by 뭉클


뼈가 드러날 만큼 마른 한 소녀가 땅바닥에 엎드려 있다.
지친 몸을 스스로 가누지도 못하는 아이 뒤편에 독수리가 미동도 없이 서 있다.
사진기자는 그 장면 앞에서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이 사진은 곧 전 세계를 흔들어놓았다.
전쟁의 참상을 한 장의 이미지로 압축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는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러나 찬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곧 질문을 던졌다.

“그는 왜 아이를 먼저 구하지 않았는가.”

사진기자는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기 위해 찍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말은 오히려 더 큰 의문을 남겼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진기자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기록의 목적이 눈앞의 생명을 뒤로 밀어내 버렸다는 부분이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이렇게 말한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그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안락함을 확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지는 고통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 고통을 대상화한다.

대상화된 고통은 잠시 연민을 일으키지만, 그 연민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미지는 결국 또 하나의 소비로 끝나버린다.

사진기자가 놓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역사의 장면을 기록하려 했지만,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에 구체적으로 응답하지는 못했다.

고통은 감상이 아니라 요청이다.

진짜 타인의 고통은 우리에게 감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가까이 와 달라. 나를 대상이 아니라 존재로 보아 달라.”

수전 손택은 그녀의 책에서,

타인의 고통은 멀리서 바라볼 때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순간에

비로소 타인의 것이 자신의 것으로 옮겨온다고 말한다.

사진 속 소녀의 고통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추상적 상징이 아니라, 지금 이 아이에게 필요한 도움은 무엇인가 라는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물음이다.

그러나 사진기자는 그 물음 앞에서 기록이라는 더 큰 목적을 먼저 선택했다.
그 선택은 고통을 폭로했지만, 동시에 더 큰 참혹함을 방관한 것처럼 오해하게 된 것이다.

손택은 바로 이 아이러니를 정면으로 직시하게 한다.
고통을 드러내려는 행위가 때로는 고통을 더 외롭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도서출판 이후


오래전 가까운 선배 언니의 집에서 작은 액자를 본 적이 있다.
햇살을 받고 수줍은 듯 웃고 있는 아프리카의 한 아이의 사진이었다.
언니가 굿네이버스를 통해 수년째 후원하고 있는 아이였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그 돈이 정말 아이에게 가는 걸까?”

언니는 조용히 말했다.

“내 마음이 그 아이에게 가까이 가 있으니까.
그래야 오래 할 수 있고, 오래 해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니까.”

그 말은 거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태도는 분명했다.
선배언니의 말처럼 연민은 감정의 크기로 평가되지 않는다.
연민은 움직임으로 이어질 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수전 손택이 말하고자 하는 타인의 고통도 그러하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본다는 것은 그 고통이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인지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인지는 아주 작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 행동이 무엇이든 좋다.
적은 금액의 후원일 수 있고,

따뜻한 말 한마디의 위로이거나,

외면하지 않는 태도와 곁에 머무는 방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그 어떤 것도 크지 않다.

그러나 이 작은 움직임의 선택들이 우리가 인간으로 남는 방식을 만든다.

수전 손택이 말하는 ‘타인의 고통’은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의 강도가 아니라,

그 고통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꾸도록 만드는 힘이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나의 인간성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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