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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오베르 쉬르 와즈'의 영화 한 장면

by 은동 누나

2019. 6 18 (화요일)


니스에서 출발한 기차는 코트다쥐르 해변의 풍경을 보여준다. 에메랄드 빛 바다와 바다 마을이 끝나면 영화의 도시 '칸'(Canne)에 도착한다. '칸'을 출발해 북쪽, 내륙으로 잠시 달리던 기차는 마지막 바다의 모습을 보여주며 남부 해안도시 툴롱 (Tulon)에 도착한다. 다시 알프스 끝자락 협곡과 산악지형을 지나면서 마르세이유(Marseille)에 가까워진다. 역이 활기차다. 무거운 짐을 끌고, 아이의 손을 잡고 가장 역동적인 역의 풍경이랄까. 니스에서 마르세유까지는 TGV 고속선이 아닌 기존선으로 완행열차 느낌으로 달린다. 다음 역은 아비뇽 (Avignon). 아비뇽에서부터 파리까지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TGV 고속선의 속도를 느껴보라는 듯이 미친 듯이 달린다. 열차 안 전광판에 현재 속도 표시가 280을 넘어가면서 차창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평야가 초록의 정지된 하나의 장면으로 느껴졌다. 소음도 없이 시속 300을 넘나드는 속도에 박수를 치며 감탄을 할 즈음

기차가 멈춰 섰다.

(기차가 멈추고 딸이 찍은 사진)


방송이 나왔다. 자국 언어로, 불어로!

전광판에도 기차가 정차한다는 듯한 메시지가 뜨고 있었지만 해석 불가하다.

열차 안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서운 상황은 아닌 듯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영어로 방송이 나오지 않았다. 10분이 지나고 다시 시간이 지나고 열차칸을 둘러보았다. 책을 읽는 여자, 눈을 감고 있는 남자,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일상의 표정으로 묵묵히 시간을 견딘다. 다시 시간이 지나고 참을성 없는 내가 일어섰다. 창밖에 기차를 점검하는 듯 두 남자가 천천히 지나가며 이야기한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표정없는 사람들 중에서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하는가 고민하는 중 불어로 짧은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기차는 다시 달렸다.


숙소에 짐을 두고 바로 나와 고흐의 오베르 쉬르 와즈(Auvers-sur-Oise)로 가는 전철을 탔다. 숙소, 샤틀레 레알 역에서 북역으로, 북역에서 Valmondois으로, 다시 환승해서 오베르까지 가려면 1시간 20분 걸린다. 그러나 기차가 연착했고 숙소를 찾아가 짐을 두고 나오니 저녁 5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딸은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했으나 6월의 파리는 저녁 10시가 되어야 해가 진다. 구글 지도를 보니 마지막 전철을 타고 돌아오면 가능할 것 같았다.


북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동양 여자와 남자아이가 맞은편에 앉았다. 아이는 여섯, 일곱 살쯤 보이고 엄마라고 하기에 너무 예쁘고 젊어 보이는 여자는 한마디 말도 없이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나와 딸의 대화를 듣는 눈치였고 우리를 슬쩍 보았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내 다리를 건드리자 여자가 아이를 무섭게 혼냈다. 내가 괜찮다고 영어로 말하는데 여자가 한국말로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오베르 쉬르 와즈 바로 전 역에서 여자는 일어섰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지만 여자는 아이를 재촉하며 내렸다. 여자가 내린 역은 한산했다.


오베르 쉬르 와즈 역은 수리 중이었고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는 작은 역이었다. 시계를 보니 7시를 지나고 파리로 돌아오는 마지막 기차는 8시 35분. 딸과 나는 구글 지도를 켜고 기차역부터 뛰기 시작했다. 지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한산한 마을 옆 작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니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오베르 교회가 보였다. 고흐의 그림에서 보이는 같은 위치에 서서 사진을 찍고 다시 5분쯤 걸었을까.

밀밭이 보이고 고흐의 무덤으로 가는 표지가 보였다.

마을 공동묘지, 동생과 잠든 고흐의 작은 무덤 앞에서 마음 한 구석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말없이 서 있는 딸과 나의 옆으로 젊고 예쁜 커플이 다가왔다. 여자는 남자의 팔에 기대고 울었다. '너무 불쌍해.'라고 말하고 여자가 흐느꼈다. (여자가 영어로 말했다.) 너무 예쁜 여자가 울어서일까. 바람이 불고 나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까마귀 나는 밀밭을 걸었다. 고흐의 그림처럼 밀밭의 갈림길에서 하늘을 보았다.


밀밭에서 라부여관으로 걸어와 맞은편 시청사를 보고 시계를 보니 8시 15분. 가셰 박사의 집을 포기하고 다시 역으로 뛰었다. 마을 슈퍼마켓이 보이고 딸이 들어가 물과 요구르트를 사 왔다. 다행히 기차역에 도착해 숨을 고르는데 술에 취한 무섭게 보이는 남자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큰 가방을 들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남자는 내게 소리를 질렀고 나는 딸아이를 뒤로 밀치며 모르겠다고 말하고 맞은편 기차 탑승장으로 갔다. 멀리서 반가운 기차가 오고 기차에 오르니 딸과 나 둘 뿐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고 창가에 딸과 마주 앉은 순간 무서운 남자가 맨 뒷칸에서 중얼거리며 휘청휘청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영문을 모르는 딸에게 그 남자가 오고 있다고 소리 질렀다. 우리는 앞칸으로 뛰었다. 다음칸은 다행히 여자 두 명이 앉아 있었고 그 두 여자 역시 뛰어오는 우리를 보고 그 무서운 남자를 보고는 우리를 따라 다시 앞칸으로 뛰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나는 그 남자가 큰 가방에서 총을 꺼내거나 폭탄을 터트린다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딸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다음 정거장에 기차가 도착했고 나는 딸의 손을 잡고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무서운 남자는 내리지 않았고 기차는 출발했다.


샤틀레 역에 도착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오니 화려한 파리의 밤이 시작되었다. 길가의 노천카페와 음식점에는 웃음소리가 넘쳐나고, 멋진 옷을 입은 젊은 남자와 여자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가게의 유리에 비친 나의 모습이 보였다. 꿈이었을까!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 1시간 30분이 지났을 뿐인데 다른 세계로 던져진 느낌이다. 고흐가 하늘로 떠난 1890년, 그때의 파리와 오베르 쉬르 와즈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기차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내리던 젊고 예쁜 여자와 엄마를 닮지 않은 아이가 생각났다. 그 여자가 외롭지 않고 행복하면 좋겠다.


에필로그


이 글을 쓰는 나를 보며,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딸이 웃으며 말했다.

밀밭에 사람은 하나도 없고 기차에서 따라오던 술 취한 아저씨도 너무 무서웠고 '오베르 쉬르 와즈'를 생각하면 '살인의 추억' 영화가 떠오른다고 그리고 그 무서운 아저씨가 기차에서 다가올 때, 싸워서 엄마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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