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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시 일기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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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Aug 23. 2024

유배지에서

꿈을 가진 것이 죄이고, 꿈을 잃은 것이 벌이옵니까


어머니,
세상 사람 모두가 저를 죄인이라 하옵니다.
제가 천인공노할 죄를 지었다며 저를 이곳에 가두었사옵니다.
그러나 저는 제 죄를 알지 못하옵니다.
천 해가 지날 동안 삼라만상 모두 살피어도
꿈결에서 부처님 존안 알현하여 감히 여쭈어도
타고난 무지 탓일까요 저는 모르겠사옵니다.

어머니,
저는 당신의 한으로 자랐고
당신의 바람으로 어른이 되었사옵니다.
하여 당신께 묻고 싶사옵니다.
꿈을 가진 것이 죄이고
꿈을 잃은 것이 벌이옵니까
제가 어찌해야 속죄할 수 있사옵니까
대체 저의 속죄는 어디 있사옵니까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멀고 먼 타향에서 파렴치한 죄인이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오리까



<유배지에서>, 2020.5


2021년 5월, 학교 도서관에서




화나(1985~)


 '화나'는 데이토나 소속 래퍼로, 정신 나간 라이밍, 언더그라운드의 상징 등으로 유명하다. 정작 본인은 언더그라운드 상징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내가 화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자습실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였다. 자꾸 유튜브가 이상한 노래 하나를 추천하는 것이었다. 이름이 <가면무도회>길래 웬 씹덕 노래를 추천하나 싶었다. 그렇게 며칠을 무시하다가, 어느 날 터치 미스로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https://youtu.be/124DoL0W5q0?si=m1ziBFAyWVS4jRIy

화나, <가면무도회>, 2009


...충격! 내 생에서 노래 하나를 듣고 그렇게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2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확장해서 봐도 이만한 충격을 준 노래는 없다. 무서울 정도의 라임과 조소, 그리고 이어지는 일말의 쓸쓸함까지. 여태껏 힙합은 인싸들이나 좋아하는 장르로만 알았는데.


 이 노래를 기점으로 나는 힙합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게 가장 좋아하는 래퍼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화나를 꼽는다.


https://youtu.be/vR7xL7Jk4ak?si=wnw34QdHAPNekXdi

화나, <유배지에서>, 2017


 <유배지에서>는 화나의 3집 <FANACONDA>의 첫 번째 트랙이다. 앨범 전체적으로 한국 힙합씬에 대한 환멸, 후회, 안타까움이 엿보인다. 이 시의 제목은 이 노래에서 따왔다. 막상 노래 내용과는 별 상관없다.




 대학교 기숙사 방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마치 감옥에 갇힌 것 같았다. 모기장이 창살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대학교에 온 게 아니라 유배를 온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다. 이미 이 시점에 나는 교사가 되고 싶단 꿈을 잃은 상태였다.


 꿈을 가진 것이 나의 죄였고, 꿈을 잃은 것이 그에 대한 벌이다. 나는 지금도 죗값을 치르는 중이다. 속죄가 끝나기 전까지, 내가 있는 곳 전부가 나의 유배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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