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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시 일기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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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Aug 30. 2024

파양 당한 아이는

우리는 모두 파양 당한 존재다


서둘러라
오늘은 일진이 사나우니
소쩍새가 네 눈알을 파먹을까 걱정이구나

어서 짐을 싸서
이곳을 떠나거라
그 어느 눈동자에게도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가거라
세상이 맺어준 인연 모두 잊고
속세를 떠나 행성으로 가거라

그곳은 그곳은
우리가 태어난 곳
네가 죽어서 홀로 태어난 곳이란다



<파양 당한 아이는>, 2018.10


<아이의 귀향>, painted by wrtn





이그니토(1982~)


 '이그니토'는 LBNC 소속 래퍼로, 쇼미더머니6에 나와 '악마 래퍼'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쇼미 이전에도 이그니토를 알고 있던 나로서는 이그니토가 방송에서 이리저리 굴려지는 게 나름 재밌었다. 우원재와 1대1 대결을 해서 떨어진 것도 충격이었고.


 이그니토가 한국 힙합씬에 파장을 일으켰던 건 2006년 발매한 1집 <Demolish>였다. 이전에 없던 다크하고 하드한 스타일에 많은 리스너들이 놀랐다. '악마'라는 별명도 이 1집 때문에 생겼다. 애초에 앨범 이름부터 저 모양인데.


https://youtu.be/lviI8ExTKp0?si=SbmveNhRSKmkac6s



 처음으로 <비관론>을 들었을 때의 충격은 감히 글로 표현할 수 없다. "희망은 공평하지, 모든 이들을 속여"라는 강렬한 시작으로 노래가 끝날 때까지 듣는이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훅의 가사가 특히나 가슴에 박혔다.

나는 거짓된 과거를 낙태한
21세기의 20대 즉 사생아


 노래는 21세기의 20대는 모두 사생아라고 칭했다. 사생아. 법적으로 부부가 아닌 남녀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뜻한다. 태어나버리긴 했지만 법적인 부모는 없는 그런 애매한 상태.




 나는 이 말에 동의했다. 동의를 뛰어넘어 더 나아가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파양 당한 처지라고. 원하지도 않은 생명을 부여받고는, 무책임하게 버려진 존재라고. 우리는 모두 홀로 태어났다고.


 파양 당한 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의 존재를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태어나 어디로 나아갔는지 알 도리가 전혀 없다. 슬픈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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