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조언했다. 세상에 나가 사람을 만나라고 나는 반문했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친구는 진절머리 난 듯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떠나갔고 술잔도 털 수 없는 나는 이 야박한 땅 위에 남아
기계처럼 걷다가 기계처럼 공부하다가 기계처럼 살다가 기계처럼 죽다 살아나다가
담배 피워 밑바닥에 가라앉은 영혼 한 숨 내쉬나 김 서리는 안경 벗으나 한 치 앞 시야 흐려지는 건 어차피 비슷하니
스물 전에 담배를 배워라 조언하던 또 다른 친구는 군대에 들어가 연병장을 구르고 이 해진 몸은 잔디 하나 없는 운동장을 거니니
이기적인 사람이여 이기적인 생명이여 어찌 아직도 안 끊기고 이어져 밤산책을 즐기시옵니까
<이기적 유전자>, 2020.10
리처드 도킨스(1941~)
학교 기숙사 가는 길에 운동장이 하나 있었다. 가끔씩 정체 모를 사람들이 단체로 운동하는 걸 빼면 딱히 공적인 용도는 없어 보였다. 식당 바로 옆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산책을 많이 했다. 저녁을 먹고 달이 하늘에 기웃거리는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하나둘 육상 트랙을 따라 걸었다.
나도 그 무리 중 하나였다. 하도 운동을 안 하다 보니 걷기라도 하자는 마음이었다. 저녁을 빠르게 먹고, 마스크를 쓴 채(한창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무작정 걸었다. 20분에서 30분 정도 걸으면 헬스앱에서 오늘 하루치 목표를 달성했다는 알람이 떴다.
내가 꾸준히 산책을 한 이유는 운동 때문은 아니었다. 산책하면 홀로 조용히 생각하기 좋았다. 이어폰으로 귓구멍을 막고 노래를 들으며, 허여스름한 달을 바라보며 걸으면서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을 했다.
산책하며 시를 많이 썼다. 걸으면서 이리저리 문구를 떠올리고, 좋은 글이 나왔다 싶으면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시를 적었다. 이 시기에 쓴 시는 모두 이 방식으로 썼다. 밤산책이 내게 시적 영감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은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했다고 한다. 산책은 인간의 창의성을 이끌어내는 마법의 효과가 있다. 이딴 생각을 하며 뻔뻔하게 밤산책을 하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이기적이지 않나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고 있는데, 나는 한적하게 산책이나 즐기고 있는 꼴이 참 한심했다.
그때 나는 생명보다 기계에 더 가까웠다. 살아 있기만 한 기계, 생명으로서 만족해야 하는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한 기계. 이런 우울한 생각을 하는 건 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서 그렇다. 리처드 도킨스, 솔직히 당신은 욕먹을 만했어. 좀 다른 표현을 쓸 순 없었던 거냐고. "모든 생명은 유전자를 전달하는 기계다"라는 말 대신, 따뜻하고 위로되는 말을 해주면 좋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