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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시 일기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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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Sep 04. 2024

사내

꿈속에서 살해당한 사내를 기억하십니까


꿈속에서 살해당한 사내를 기억하십니까
꿈에 취한 나머지 고꾸라져버린 그 사내 말입니다

검시관은 그의 시신과 사랑에 빠져
백골을 훔쳐 에덴의 동산 아래 까마득한 지하에 숨었지요

이따금씩 그가 그리워지면
감히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상상하곤 합니다
누가 알았을까요 광활한 뜻을 담기에 인간의 육체는
너무나도 비약하다는 사실을
하늘을 꿈꾸어도 땅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절망을
그 누가 알까요 어찌해야 모릅니까

자신에게 날개가 달려 있다고 착각하여 추락사한 사내를 기억하십니까
이따금씩 그가 부러워지는 까닭은
닿지 못할 것을 동경하는 미련스런 마음이
아직도 흔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사내>, 2022.5


<날개>, painted by Midjourney




이상(본명 김해경, 1910~1937)


 '이상'은 난해시를 쓴 것으로 유명한 한국 시인이다. 대학생 때 처음 <오감도>를 읽었을 때 당혹감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이 정녕 시가 맞나. 학창 시절에 배운 것과 너무 다른데.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인터넷에 해석을 찾아보았다. 무한순환소수 얘기가 나오자마자 바로 사이트를 닫았다.


 몇 달 동안 꾸역꾸역 <오감도>를 읽었다. 읽긴 읽었는데 정작 머리와 가슴에 남은 것은 별로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장을 넘기는데... 책이 끝나지 않았다. <날개>라는 이름의 글이 나타났다. 알고 보니 <오감도>와 <날개>를 합친 책이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무력감은 감정 중에서 인간이 가장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다. 무력감이 무서운 이유는 무력감은 늪과 같다는 점이다. 늪에 빠진 사람은 혼자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처럼, 무력감에 먹힌 사람은 절대 스스로 무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밤에는 잠을 자지 않나? 알 수 없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잠만 자느라고 그런 것을 알 길이 없다.


 이때 당시 나는 무력에 휩싸인 상태였다. 멋대로 병원을 안 간 탓이었을까. 공부도 제대로 되지 않고, 그저 독서실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거울이란 제 얼굴을 비칠 때만 실용품이다. 그 외의 경우에는 도무지 장난감인 것이다. 이 장난도 곧 싫증이 난다.


 내 삶이 모두 모조품 같았다. 분명 내가 선택한 이고, 대학이고, 삶이었는데. 그렇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런데 어째서 의욕 하나 없이 허송세월 보내고 있는가. 왜 전지가 떨어진 장난감처럼 고장 나 있는가.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꿈을 꾼 게 아니었다. 꿈에 취한 것이었다. 꿈에 취해 나를 제대로 보지 못했고,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실로 세상에도 이상스러운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최면약 아달린 갑이었다.


 내게 날개가 달려 있다고 착각해버렸다. 고개를 꺾어 하늘만 바라본 탓에 땅을 디딘 두 발을 보지 못하고 날갯짓을 하며 날고 있다고 착각했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그에 대한 대가로 나는 추락했다. 광활한 하늘을 동경한 대가로 지하 깊은 곳으로 추락해버렸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처음부터 내게 날개 따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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