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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시 일기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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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Aug 14. 2024

거울 3

그의 시대가 녹슬어갔다


『시월의 일지』

창공에 구름이 얼룩진 가운데 햇빛이 불청객처럼 달려들었다.
길거리 곳곳에 담뱃재와 표정 없는 얼굴이 끼어 있었다.
현관문을 비집고 들어간 후 코트에 묻은 햇빛을 툭툭 털어냈다.
허공에 성냥불이 피어올랐다.
불이 필요한 존재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들을 애써 무시한 채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거울 속 사내는 변함없이 어긋난 행색이었다.

『금이 간 액자에 담긴 자화상』

잔뜩 습기를 먹은 그는 표상으로 침전해갔다.
계절이 죽어가는 와중에 그는 기다릴 뿐이었다.
그의 시대가 녹슬어갔다.
그가 거울 너머로 달아났다.
무한히 연결된 삼각형과 사각형과 오각형과 육각형과 성상체와 선형 프리즘과—
—그것은 사내의 도주 경로


<거울 3>, 2022.9


<거울|자화상>, painted by Midjourney




 거울을 싫어다. 거울을 보면 항상 어색한 표정의 사내가 서 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보아도, 웃는 법을 모르는 외계인이 인간을 흉내 내는 듯 흉측하고 기괴한 꼴이었다. 거울을 볼 때는 아침에 머리가 뻗쳤나 안 뻗쳤나 확인할 때 말고는 없었다.


 학교 화장실에 들어갔다. 거울이 깨져 있었다. 누군가 공이라도 던져 맞혔는지, 우측 상단에 움푹 파인 곳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었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는 어긋난 행색을 하고 있었다. 조각난 얼굴이 불량 퍼즐처럼 서로 맞지 않았다. 어째선지 그 꼴이 마음에 들었다.


 쉬는 시간이 다 가도록 거울을 관찰했다. 거울의 금은 다채로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마치 선형 프리즘 같았다. 마침 과학 시간에 프리즘을 배우던 참이었다. 무지개빛 선형 프리즘이 아름다운 모형을 이루고 있었다. 대학생이 되어 배운 신경생물학에서 그 모양이 꼭 성상세포를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따금씩 우울해져 거울을 볼 때면 거울을 깨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거울을 깨 황홀한 성상체를 거울에 새기고, 그 경로를 따라 도망치고 싶다. 내 생각을 엿보기라도 한 듯, 거울 속 사내는 나를 비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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