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켄틴 텀블러
어느 휴일이었던가 재수를 하던 시절 학원 친구 동네에 나들이를 간 적이 있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나른한 날의 오후였다. 여의도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난 이후인지 친구 집에 갔다가 자전거를 타러 갔는지 순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친구 집은 여의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동네에 도착해 친구 집을 향해 가는데 좁은 골목길을 따라 단층 한옥들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무척 놀라웠다. 길고 깊은 골목을 따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거대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 읽고 있던 김수영의 시집 제목인 ‘거대한 뿌리’가 연상되기도 했다. 주택가야 한두 번 봐왔겠냐마는 그동안 본 곳과는 스케일이 다른 풍경이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이 이 부근이다. 친구가 살던 주택가는 아파트 단지로 변한 지 오래되었다. 그나마 예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돼지갈비 골목 정도가 아닐까 싶다. 동네에는 이 골목의 음식점 말고도 노포가 몇 군데 있는데 오래된 중국집이 두어 군데 있고 멀리서 원정을 올 정도로 유명한 평양냉면집도 있다.
좌석수가 많고 냉면을 먹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 평소 냉면집 앞에 줄을 서는 일은 잘 없는데 여름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해가 그대로 내리쬐는 땡볕에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줄을 선다. 냉면을 좋아하지 않는 내 입장에서는 이해 불가인데 평양냉면 마니아인 아내는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 냉면은 여름 음식이 아니고 겨울 음식이니 여름이라고 평양냉면집 앞에 줄을 서는 행태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냉면을 사계절 음식이라고 쳐도 유난스럽게 여름에만 냉면을 찾는 행동은 여전히 잘못된 것이니 이러나저러나 냉면집 앞의 인파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된다.
냉면이 여름 음식인지 겨울 음식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경우 특별히 계절에 따라 음식을 달리 먹지는 않는다. 복날이 되었다고 꼭 닭을 먹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떡국 같은 명절 음식도 의미 없긴 마찬가지다. 다만 아주 더운 여름 한철 커피만은 아이스커피를 찾게 된다. 커피를 사 먹는 경우는 많지 않고 보통 직접 만들어 먹는데 아이스커피를 만드는 일은 뜨거운 커피를 만들 때보다 공정이 늘어나고 얼음과 진공 텀블러도 따로 준비해야 해 조금 번거롭긴 하다.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것 외에도 텀블러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등교하는 아이가 생수를 받아가는 통으로 매일 사용하고 외출할 때도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차가운 음료뿐만 아니라 따뜻한 음료를 보관하는 데도 텀블러는 필요하다. 이래저래 필요에 따라 텀블러를 구입했고 예비용으로 또 구비를 하다 보니 텀블러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위 베어 베어스>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만화의 주인공인 곰 세 마리가 어느 날 에코백을 접하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무턱대고 에코백을 구입하다 보니 에코백에 치여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쯤 되면 에코백은 더 이상 에코백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에코에 반하는 소비문화의 첨병이나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우리 집의 스테인리스 텀블러 상황도 약간은 이와 비슷한 형편이 된 것 같다.
집에 있는 스테인리스 바틀과 텀블러 중에서 클린켄틴 브랜드만 따로 모아 보았다. 더블월 텀블러만 놓고 보자면 20온즈 사이즈가 두 개, 16온즈가 네 개, 12온즈가 두 개로 억지로라도 이해를 할 수 있는 수준인 것 같기는 한데 모아놓고 보니 많긴 하다. 와인 카라프의 경우 와인병의 무게를 줄이는 역할도 있으므로 싱글월이 적당하나 그다지 쓸 일이 많지는 않았다. 그 외에 더블월 바틀이 하나, 싱글월 바틀이 하나 있는데 이것도 나름의 쓰임새가 있다고 애써 우기고 싶어 진다.
뚜껑 윗면이 대나무 재질로 된 싱글월 텀블러 두 개만은 어디에 쓸지 애매해 사용하지 않은 상태로 보관하고 있는데 용도를 고려하지 않은 무지성 구매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싱글월 텀블러는 차가운 음료를 넣으면 표면에 이슬이 맺히고 뜨거운 음료를 넣으면 용기가 뜨거워져 잡을 수가 없으니 상온의 물을 즐기는 사람이면 모르겠으나 차가운 물을 좋아하는 우리 집 식구들에게는 영 맞지 않는 물건이다. 친환경 스테인리스 소재에 역시 친환경 소재인 대나무가 결합되어 환경친화적 제품의 포스를 내뿜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 텀블러 두 개는 중고로 판매할까 생각을 했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로부터 단칼에 거절당했다. 우리 집의 텀블러 라인업은 한동안 이대로 유지될 전망이다. 사진 촬영 후 싱크대 구석에 다시 자리를 잡았고 당분간 꺼낼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