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은 종갓집이다.
아빠는 본인의 정체성을 종손이라는 점에서 찾는 분이시기에, 엄마는 평생을 제사 속에서 사셨다.
종갓집인 우리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있는 제사가 있었고, 나는 누구의 제사인지도 모르는 제사상 앞에서, "쟤는 아들인 줄 알고 낳았는데 딸이어서 안 됐어" 소리를 매번 들었다. 엄마는 아들이 없어서 어떡하냐. 제사상은 실컷 차리고 제사도 못 얻어먹어서 아깝겠다, 국이 짜다. 싱겁다. 오늘은 갈비가 없네 등등의 소리를 들으며 바보같이 웃기만 했었다.
엄마가 칠십이 되면, 할머니도 안 계시니, 며느리에서 제사에서 은퇴시켜 주신다고 아빠는 약조했지만. 칠십이 넘어도 팔팔하게 건강한 엄마를 보며 아빠는 "어떻게 제사를 차례를 없애냐"면서 버티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빠는 아들이 없다는 핑계로, 제사를 합치고, 줄이고, 선산을 정리하기 시작했었다.
아들도 없는데
그 말은 평생 엄마의 가슴에 비수가 되었지만, 제사를 없애기 시작하는 데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긴 했다.
"내 부모 제사를 네가 감히 없애냐?"라고 따지는 다섯째, 여덟째 작은할아버지들도
물려줄 아들이 없다는 말에 툴툴 대기는 했지만, 막아서지도 못했다.
( 사실 내가 어릴 때는 양자를 들이자는 말도 했었단다. 어디서 첩을 데려와 씨받이를 하지는 말도 했다고 한다. 만약 돈이 있었다면 정말 그렇게 했을지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할아버지, 아빠의 아버지가. 돈을 다 쓰고, 빚도 지고 돌아가셔서 아빠는 어디 가서 아들을 가지고 오지는 못했다.)
결국 몇 년 전 증고조, 고조, 그의 부인. 증조, 그의 부인과 작은 부인 제사를 없애는 데 성공했지만. 차례만큼은 미루고 미뤄댔었는데. ( 그 와중에 내 조부모, 즉, 아버지의 부모님 제사는 남들 몰라 간소하게 지내고 계심)
결국 올해
감기기운이 있는 엄마를 핑계로
아직 살아계신 90 넘은 작은할아버지들 ( 아빠에게는 작은 삼촌들 )의 허락하에, 차례도 없애게 된 것이다.
( 결국 며느리가 아파야 제사, 차례가 없어진 다는 것은 진리인 듯 )
차례가 없다, 찾아오는 손님도 없다.
엄마보다 미혼 언니가 정말 좋아했다. 손님맞이 + 잔소리 맞이를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랑 살고 있는 미혼 언니는 매년 음식을 돕고는 사람들이 올 때쯤에는 잔소리를 피해 여행을 가곤 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어디 안 가고, 본인 먹고 싶은 거, 조카들 먹이고 싶은 것을 요리하며 편하게 집에 있을 수 있었다.
나는 출가외인이라 15년 전부터 상관없었지만, 이제야 엄마가 은퇴를 했다는 점에. 너무나 축하를 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먹을 음식만 손주들이 좋아하는 것만 양껏 해서 편하게 먹고
식기세척기가 설거지도 돕고
누워 뒹굴고
티브이 보며 수다 떨고
한숨 낮잠도 자고
점심 먹고 남은 것으로 저녁을 때우고 얼굴이 통통해져서 집으로 왔다.
친정에서 이렇게 하루를 느긋하게 보낸 것이 거의 처음이었다.
다음 추석은, 전날에 시댁에 가고, 당일에 친정에 와서, 엄마를 위해 외식도 하고, 예쁜 카페도 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빠는 좀 섭섭하기도 한 것 같다. 허전한 듯 한 그의 모습에 내가 한 마디 했다.
"그렇게 제사 지내봤자. 아들도 안 내려준 조상이 뭐 그리 좋다고. 자식들이 지금 안된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성공한 것도 아니고, 언니는 시집도 못 갔는데. 이렇게 짜게 복을 주는 조상이 뭐라고 아쉽데요? 그냥 조상님 덕에 명절에 이렇게 재미있게 노네요. 하는 마음으로 명절마다 나가서 놀아요"
예전의 아빠 같았으면 "내가 아들 없는 죄인이라 더 열심히 제사를 지냈어. 제사를 지내서 니들이 지금 정도라도 사는 거야. 쥐뿔도 없는 것들이" 라며 성을 내셨겠지만
올해는 어쩐지.
"놀러 나가고 외식 나가면, 사람들이 종손이 명절에 나가서 밥 사 먹는다고 욕하니까. 그건 못하겠다. 그래도 사다가 먹고, 오후에 외출하자" 라며 기가 팍 죽어 말씀하시는데
또 짠 하기도 했다.
사실 엄마의 일감이 줄어든 것은 아닐 것이다.
손주 맞이 일감이 더 많으면 많았지 싶다.
그래도 내 손주 밥 하는 거랑 잔소리 시댁 식구들 맞이하는 거랑 어찌 같을까
80살이 되도록 시댁 식구는 시댁식구니까
아무리 며느리 노릇을 잘하고, 종갓집 맏며느리라도, 허울만 좋을 뿐
곳간 열쇠 쥐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집안 대소사를 결정할 일도 없는 이 시대에
며느리는 그저 며느리일 뿐이니
그나마 이제는 아들 없는 게 하나도 안 서럽다
딸들이 더 좋다. 요즘엔 며느리살이 한다더라
딸 둘이 사이가 좋고, 잘 사니 걱정이 없다 는 소리를 제법 해주시니
다행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