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는 나도 그와 같은 마음일 거라, 서로 연인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빈아 눈동자에 비친 그. 수줍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그동안 자기에게 준 확신에 찬 표현들에 그도 그 말을 할 용기를 얻었을 테니 말이다.
(두 손을 모으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 빈아.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 정면.)
그러나 내가 한 답변은 YES가 아니었다.
빈아_생각할 시간을 줘.
(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 빈아의 대답에 당황한 듯한 그.)
뜨겁게 불타올랐다가, 그렇게 상대방도 뜨겁게 태워버렸으면서 갑자기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
(빈아에게서 나온 불씨가 그에게 날아가고 그는 불타고 있다. 그러나 빈아는 차갑게 얼어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지속되면서 빨리 결정을 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그때 내가 생각한 최선의 답변이 바로 그것이었다.
(텍스트만.)
... 내가 선택했으면서 많이 울며 힘들어했던 첫 이별 후의 나도 어쩌면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것이 사랑인지 모르는 사랑, 나에게 첫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가을이 돌아올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스친다. 우리는 왜 하필 함께한 계절도 가을이었을까. 뜨거운 여름과 차가운 겨울 사이, 쓸쓸하고도 아린 계절인데.
설명_빈아의 첫사랑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프로필 링크 - 빈아의 브런치 스토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한 편의 연애 소설처럼 읽어 주시길.
(다정히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
대학교 1학년 가을, 나와 동기들은 중간고사 공부를 잠시 미루고 다가오는 학교 축제에 들뜬 마음으로 선선한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축제 기획단까지 운영하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나는 어느 날 한 친구의 소개로 다른 학교 사람들과 미팅(흔히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단체 소개팅과 유사함) 자리를 갖게 됐다. 같이 나가게 된 친구들과 재밌게 술자리를 즐기다가 오자는 마음으로, 큰 기대 없이 나갔던 그날, 나는 그곳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
우리는 3명씩 마주 보고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하면서 서로 호감이 가는 사람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나는 나와 마주 앉은 사람에게 눈길이 갔고, 그걸 그 사람도 알게끔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아주 쑥스러워하며 내 호감 표시를 받아줬다. 오히려 내 선택에 나보다 떨려하는 게 느껴져서 더 설렜다. 순수하고 착한 모습에 조금씩 귀여운 행동을 하던 그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게 왜 자기를 지목했냐고 물어왔을 때 내가 귀여운 사람을 좋아하는데당신이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의 나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어쩌면 20살이기에 가능했던 꾸밈없는 표현이었다.
자리가 길어지면서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됐고, 다 같이 흩어져서 걸어가던 중 그 사람이 내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수줍게 핸드폰을 내밀며 내 번호를 물어봤다. 그렇게 따로 연락하면서 알게 된 건데, 우리 둘 다 연애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날 서로가 서로로 인해 처음으로 떨리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며칠 뒤, 우리는 그가 다니는 대학교 근처에서 만났다. 나보다 한 살 많았던 그는 정말 신기한 사람이었다. 성별만 다를 뿐 나와 속이 똑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심지어 가치관까지 비슷했다. 내가 하는 얘기에 단순히 호응해 주려고 답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도 그렇다는 반응이어서 하루 종일 놀람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앞에서 나는 그냥 나였다. 나일 수 있었다. 잘 보이기 위해 나를 숨기거나 표현을 감추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며 내 마음을 진심으로 전했다. 그 사람이 나를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 순간부터는 내가 이렇게 적극적인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때그때 드는 생각들을 떨리지만 명확하게 말했다. 이런 걸 보고 '운명'이라 하는구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던 하루였다. 늦은 저녁이 되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던 우리. 나는 앞으로 펼쳐질 그와의 연애가 정말 행복할 거라는 기대를 잔뜩 하며 거의 날아가듯 집으로 갔다.
학교 축제를 무사히 마치고 약 일주일간의 연락이 이어진 끝에 다시 만났던 날, 그러니까 단 둘이 두 번째 보는 날이 왔는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분명 나는 그를 좋아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 마음을 다 표현하며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단계였는데, 도리어 확 식어버린 내 감정을 인지할 뿐이었다.
20살의 나에게 '사랑'은 설렘, 떨림, 벅차오르는 마음이었다. 상대가 보고 싶고, 궁금한 것이었다. 그가 내게 보여주는 그 모습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게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첫 만남 때와 달리 그 사람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심지어 설레지도 않았다. 진짜 좋아하는 게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루종일 그는 내게 당장이라도 고백할 것 같은 눈빛을 보냈고, 그날 저녁, 나는 예상했던 말을 듣고야 말았다.
'나랑 사귈래?'
아마 그는 나도 그와 같은 마음일 거라, 서로 연인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그동안 자기에게 준 확신에 찬 표현들에 그도 그 말을 할 용기를 얻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한 답변은 YES가 아니었다.
'생각할 시간을 줘.'
뜨겁게 불타올랐다가, 그렇게 상대방도 뜨겁게 태워버렸으면서 갑자기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지속되면서 빨리 결정을 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그때 내가 생각한 최선의 답변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마 그는 나보다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 와중에 부연 설명은 덧붙였다.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연애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예상했던 시나리오를 벗어나면서 불편한 기운이 우리를 감쌌다. 나는 일단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나가자고 했고, 우리는 첫 만남 때처럼 한강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계속되는 내 변명 아닌 변명에 그는 아이러니한 표정을 지었고, 다시금 만나보자고 얘기하며 한번 더 용기를 냈다. 차마 당신의 지금 그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인데, 벅차오르는 걸 넘어 감정이 밖으로 새어 나와 상대에게까지 전해지는 게 바로 내가 원했던 연애인데 내게 그 정도의 감정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감정을 외면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과연 나는 저 정도의 마음인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그렇게 한강에 도착할 때쯤, 나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좋았던 기억만 한껏 끄집어내서, 이 사람이 내 첫사랑이 되어준다면, 첫 애인이 된다면 정말 좋겠다 싶었다.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는 연애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바쁜 걸 즐기는 사람이고, 그래서 우리가 만나면 그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나랑 만나볼래?'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YES를 답했고, 내 손을 살짝 잡았다. 아까부터 계속 내 손만 쳐다보며 누가 봐도 손 잡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쭈뼛거리더니. 그렇게 꾸밈없이 순수했던 그와 손이 맞닿은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사랑 그 자체였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넘쳐흐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내뱉는 듯한 말투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첫 애인이 된 상태로 맞이한 다음날. 나는 창신동에서 옷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 활동을 핑계로 의도적으로 답장을 늦게 하는 내 모습을 자각했다. 그리고 서로 고백을 주고받았던 전날 저녁, 한강에서 함께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버스 유리문에 비쳤던 우리의 모습이 스쳤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좋았던 감정이 다시 한번 식는 경험을 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 그 사람의 감정이 부담스럽다는 것을. 나에게까지 전이되는 설렘에 나까지 속아서 이하동문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부터 미안한 마음까지 겹치면서 다음날까지 심란함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날 밤 그에게 받은 '사랑해'라는 문자에 더 차갑게 얼어버렸다. 그래서 어느 때와 같이 솔직한 내 마음을 그에게 전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솔직했는지, 불타올랐다가 확 식어버린 것 같다는 직접적인 표현을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 입장에선 자기는 사랑한다고 했는데 돌아오는 답변이 참 미웠겠다.
돌아온 텍스트로 느껴지는 그의 말투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외면하고 싶었던 걸 기어이 마주한 듯한 사람 같았다. 한참을 다정히 나를 달래던 그가 말했다.
'이제 곧 추석인데, 우리 그때까지만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갖자.'
그렇게 우리는 3일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 중 하나로 그때를 뽑는다. 다시 돌아간다면 혼자 생각에 잠기거나 주변인들의 말에 휩쓸리지 않을 거라고. 짧게라도 직접 만나서 확인했을 거라고. 아니, 그냥 일단 시작했을 거라고. 그와의 연애는 분명 행복했을 테니.
추석이 되고, 나는 사촌 오빠와 통화를 하며 내 마음을 확인했다.
'그 사람이 계속 궁금하다면 더 만나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은데, 그렇지 않다면 하루라도 빨리 정리를 하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야.'
그때의 나는 정말 그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자를 택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했고, 그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상대에게 감정이 식어버린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하고 싶어 하며 그의 단점까지 억지로 찾아내고 있는 나를 보면서 더는 지체하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약속했던 3일이 지나고, 우리는 내가 살고 있는 곳과 가까운 카페에서 만났다. 나는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기 위해 그와 연락했을 때부터 이미 예감했다. 서로가 다른 결론을 가지고 만나게 될 거라고. 덤덤한 나와 달리 그의 텍스트는 여전했다.
먼저 도착한 나는 도저히 어떤 것도 삼킬 수 없을 것 같아서 음료를 주문하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미안함, 아림, 복잡함, 덤덤함이 복합적으로 소용돌이치고 있는 내 속이 정말 고통스러웠다.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 식욕이 극도로 떨어져서 뭐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해 체중이 확 줄었더랬다. 심리적인 게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텅 빈 상태에서 마주한 그에게 나는 내 마음을 차분히 전했다. 이미 상처를 주고 있으면서 더 큰 상처는 주기 싫어서 당신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고,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등의 직접적인 표현은 피했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내 말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고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
우리의 마지막은 지하철역 출구 앞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분명히 기억한다. 그가 정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한 몸짓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라고 했고, 나는
'나보다 오빠를 더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먼저 돌아섰다.
그날 나는 준비했던 말들을 마쳤고, 그를 덤덤하게 대하자는 다짐도 지켰다. 그러나 한 가지를 더 생각했어야 했다. 어떤 확신으로 앞으로도 계속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어떻게 나는 그렇게 매정하고 단호했던 걸까.
20살이었던 나는 어느덧 26살이 되었다. 여전히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가 떠오르고, 아직 나에게 그 정도로 벅찬 감정을 보여주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너무 선명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을 내뱉으며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 상태로 연애를 했다면 그것도 그에게 못할 일이란 생각이 들다가도, 그렇게 나를 순수하게 좋아해 주는 사람을 다시는 만나기 어려울 거라는 걸 그 어린 나이에도 알았으면 함께하는 선택을 했어야지, 하며 후회한다. 감정 소모를 하며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되고, 그래서 나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연애. 지금 내가 꿈꾸고 있는 희망 사항들은 그때였다면, 그였다면 가능한 이상적인 연애 시나리오일 뿐이다.
우린 열흘간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만난 건 고작 3일이었다. 그 3일 동안 무작정 설렜다가 연인이 되었다가 헤어졌다.
헤어지고 나서 나는 그의 연락처와 모든 기록을 지웠다. 눈앞에 흔적들이 보이는 순간 스스로가 힘들거라 생각했다. 다가오는 중간고사에 몰입하며 꿈같았던 시간들을 잊으려 노력했다.
바로 뒤에 이어졌던 시험기간에 정신없이 몇 주을 보내고, 그로 추정되는 번호로 몇 차례 연락이 오던어느 날. 가까운 친구에게 나와 비슷한 일이 생겼다. 친구의 상황은 나와 반대였다. 이전에도 몇 차례 상대가 자기만큼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 했던 친구는 상대로부터 갑작스러운 헤어짐을 '당했다'. 내 앞에서 그 친구는 정말 많이 힘들어했다. 그 모습이 내가 헤어짐을 고했던 그와 겹쳐지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도 이렇게 힘들어했을까 싶은 생각에 많이 슬퍼졌다.
그런 단호한 나를 두고 그는 하고 싶은 말도 다 못 했겠구나.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전화가 오면 받을 생각으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지금이라도 그때 내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해줄 수 있겠냐고. 괜찮으면 전화로라도 얘기를 나누자고.
며칠 뒤, 우리는 약속한 시간에 통화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 마음이 혹시 변했다면 연락을 받아줄 거라 생각해서 그 희망으로 계속 전화를 했던 것인데, 돌아왔던 답은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어서 오늘 자기 역시 정리를 하고자 한다고. 그 말을 들은 뒤로 나는 '미안'하다는 단어의 뜻을 세포 하나하나까지 깊게 느끼다 못해 또다시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집중하지 못했다. 가을의 끝에서 우리는 그렇게 또다시 이별했다.
만약 그가 26살이 된 지금의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할 것임이 당연하다. 사랑을 하면 어떤 모습인지 눈앞에서 보여줬던 사람이었고, 나에게 '사랑'은 곧 그였다. 그 모습이 기준이 되어 그 어떤 사랑도 그에 비해 충분치 못하다고 여기고 있다.
내가 선택했으면서 많이 울며 힘들어했던 첫 이별 후의 나도 어쩌면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것이 사랑인지 모르는 사랑, 나에게 첫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가을이 돌아올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스친다. 우리는 왜 하필 함께한 계절도 가을이었을까. 뜨거운 여름과 차가운 겨울 사이, 쓸쓸하고도 아린 계절인데.